404호
또 다른 하루가 지나버렸다. 봄이 지나고 여름으로 접어드는 시기라 날이 아주 좋았다. 햇볕이 잘 내리쬐는데도 봄이 아직도 지나가기 싫은 것처럼 날이 덥지 않고 시원했다.
햇빛이 건물 전체를 벌꿀같이 부드러운 노란 빛으로 물들였다. 아침 햇살이 4층 어느 방에도 들어왔다. 그렇지만 햇빛을 받은 방은 반짝이기는커녕 오히려 구석의 먼지까지 다 보이는 바람에 몹시 더러워 보였다. 방 안의 모든 인테리어도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것처럼 시커멓게 썩은 채였다. 언뜻 보면 이 방에 누가 사는 것 같지 않았다. 놀랍게도, 골든 리트리버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 뚫린 걸레에서 기나긴 잠에서 깨어날 듯이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 일어나라는 명령을 내린 듯, 머리를 긁으면서 몸의 모든 근육을 풀어 시동을 걸었다. 침대 깔판에서 일어난 그것은 온 힘을 짜내 침대 건너편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그것은 한동안 씻지 못한 것 같은 머리를 긁으면서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바퀴벌레가 방 안에서 일광욕하는 것을 구경하면서 신기해한다. 그러고는 잠시 거울을 보며 본인이 왜 들어가면 안 되는 곳에 당당하게 있을까 문득 궁금해한다. 무의식 상태로 샤워실에 갔다. 양치를 하려고 말라비틀어질 듯한 치약 통을 애써 짜낸다. 세수와 양치가 끝난 뒤, 그것은 자신감을 되찾고는 거울을 바라봤다. 야생 동물 같은 몰골을 벗어나 인간다운 생김새를 찾은 그것이 거울을 보면서 신기해한다. 어떻게 세수 같은 사소한 동작만으로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는지 새삼 놀라웠다. 그것은 거울을 보며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낸다. 그것의 이름은 진호이다.
진호가 이 방에서 혼자 지낸 지도 며칠이 채 되지 않았다. 얼마 전, 아무 생각 없이 짐을 끌고 서울 어느 곳을 떠돌던 진호는 우연히 이 아파트를 발견했다. ‘스위트 홈’에 나올 법한 아파트 빌딩에 들어와 4층으로 가봤더니 빈방이 많았다. 그렇지, 아시아 문화에서 4가 얼마나 불길한 숫자인데, F층 같은 걸로 바꾸지 않으면 그 층에 아무도 안 들어오겠지. 그런 생각으로 진호는 큰마음을 먹고 404호로 가보았다. 역시, 4층의 4번째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진호는 방 안에 짐을 놓고 바닥에 앉았다. 원래 잠겨있지 않은 방이라 진호는 이틀 동안 아무도 못 들어오도록 문을 막는 방법을 이것저것 다 시도했다. 사실 이틀 동안 분명히 경비 아저씨가 눈치채셨을 법도 한데, 아무 말도 안 하니까 진호도 불안한 마음을 내려놓았다. 만약에 입주자가 들어올 것 같으면 짐도 얼마 없으니까 빨리 치우고 나가면 되겠지…. 근데 누가 제정신으로 굳이 404호에 서둘러서 이사하겠어…?
돈이 한 푼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벌지 않으면 곧 진짜로 빈털터리가 될 것이기에 진호는 어떻게든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서울에서 미성년자의 신분으로 일을 찾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보호자도 없는 진호가 일자리를 구하기란 다른 이들보다 적어도 백배는 더 어려웠다. 아파트 주변에 있는 편의점들을 다 가봤지만 알바생을 구하는 데가 아무 데도 없었고, 구한다고 해도 미성년자는 받지 않았다. 받아주는 데가 없어도 어떻게든 먹고 살기 위해 진호는 꾸준히 나가서 일을 구하고는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샤워를 마친 진호가 책상 위에 있는 시계를 본다. 아침 6시다. 꽤 이른 시간인 것을 알고 놀랐다. 원래 늦잠을 많이 자던 터라 아침이 이렇게 밝을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여름이 조금 더 싫어졌다. 해가 이렇게 일찍 뜰 줄 알았으면 여름을 더 싫어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진호에게 최악의 계절은 항상 여름이어서, 머릿속에서 싫어하는 계절의 순위가 딱히 바뀌지는 않았다. 해가 이렇게 일찍 뜨면 나중에 잠에서도 쉽게 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도 깊이 자지 않았는데, 악몽을 꾸니 잠을 잘 자지도 못했다. 사실 자는 시간이 많았을 뿐이지, 잠이 많은 편도 아니었다. 진호는 문득 엄마를 떠올렸다. 예전에 진호가 악몽을 꾸다가 깨면 엄마가 항상 옆에 있고는 했다. 그러고는 진호를 달래면서 예수님께서는 좋은 아이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따뜻한 우유를 주고 잘 자라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렇지만 혼자 지내기 시작한 뒤로는 밤에 자다 깨도 엄마의 따뜻함 대신 몸에 흐르는 식은땀만 느낄 뿐이었다. 게다가 이 방은 냉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찬바람이 그대로 느껴지는 곳이었다. 사실 진호는 이곳이 몹시 무서웠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이 건물의 을씨년스러운 모습 때문이었다. 출입 통제도 제대로 안 되었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같이 낡은 외관을 보면 순식간에 벽돌 더미 아래에 묻힐 거라는 상상 때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 상상에 시달리는 것도 괴로웠지만, 아무래도 매일 밤 악몽을 꿔서 깨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10분 동안 시계를 쳐다보면서 멍하니 있었던 진호가 드디어 정신을 차린 것 같다. 가출하고 나서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이 인제야 실감 났다. 혼자 살면서 모든 버릇과 습관이 통째로 바뀌었지만, 딱 하나 바뀌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매일 일기장을 쓰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의 숙제였을 뿐이었는데 진호한테는 매우 유용하고 좋은 습관으로 남았다. 진호가 이 습관을 좋아하는 이유는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내성적인 진호에게는 누군가에게 직접 말하는 것보다 일기장에 쓰는 것이 더 나았다. 왜냐하면 일기장에서 진호만의 사고(私考)1를 문장으로 자유롭게 펼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변 사람들한테 말할 수 없는 것, 자신만의 생각을 다 적어놓으면 마음도 가벼워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호가 교회를 다니는 부모님한테 항상 들어왔던 이야기는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 어느 날에 소꿉친구 성화를 보면서 좋아하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때부터 진호는 자신이 다른 아이들과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부모님에게서 여태까지 배워온 바로는, 동성 친구를 좋아하는 것은 죄이다. 진호는 성화를 짝사랑하는 생각을 사고(私庫)2에 남기지 않으면 언젠가는 왠지 부모님에게 사고(事故)3를 칠 것 같았다.
그래서 진호는 가장 솔직한 사고를 일기장에 쓸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진호에게는 일기장이 절친이었다. 온종일 일기장에 무엇을 쓸지에 대해 고민만 하고 다닌 것 같았다. 워낙 쓰는 것을 좋아해서, 반년만 지나도 200쪽짜리인 일기장을 새것으로 바꾸어야 했다. 고등학교에 올라올 때쯤에는 모든 감정을 일기장에 쏟아내느라 일기를 무려 15권이나 썼었다. 자식의 사생활을 존중하지 않는 아시아 사회에서 자라난 진호는 그 15권의 일기장을 8년 동안 부모님이 보지 못하도록 완벽히 숨겨놓았다. 어찌나 치밀했는지, 아예 부모님께 보여드릴 가짜 일기장을 만들고 진짜 일기장은 방 안 곳곳에 숨겨두기도 했다. 진호는 부모님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가짜 일기장에는 사고(私考) 대신 부모님이 읽고 싶어 할 진호의 공고(公考)4를 썼다. 오늘 눈을 뜨고 나서 든 생각을 일기장에 적고 나서 책상에서 일어나 방을 치웠다. 그나마 진호에게 간직할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것들을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었다. 한 시간 전에는 차마 눈 뜨고 보지도 못할 정도로 더러웠던 방이 깨끗하게 변했다. 진호가 이렇게 바뀔 수 있었던 것도 사실 일기장 덕분이었다. 진호의 집에는 원래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가 있었기에 집안일에 손을 하나도 대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지만 진호는 방 안에 숨긴 일기장을 들키기 싫었고, 자기 방은 스스로 치우는 것이 기본이라는 생각에 자기 스스로 하겠다고 부모님에게 말했다. 한창 숨기는 것이 많다고 의심했던 부모님은 걱정 끝에 진호가 그냥 독립적인 아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부모님은 친한 친구가 성화 한 명밖에 없을 정도로 진호가 독립적인 성격이라는 것을 계속 걱정해왔던 것 같았다.
성화는 유치원 때부터 진호와 친한 친구였다.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절친의 캐미를 둘 사이에서는 자주 볼 수 있었다. 물론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이 반복되었지만, 서로 가장 필요할 때 힘이 되는 그런 친구 사이였다. 진호는 짐을 정리하다 문득 성화를 떠올렸다. 성화는 어렸을 때부터 성격이 굉장히 밝았다. 아무리 분위기가 싸하더라도 그 자리에 성화만 있으면 순식간에 밝아질 수 있을 정도였다. 성화는 어디 가든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인싸 중의 인싸였다. 모든 친구에게 차별 없이 다정하게 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항상 밝은 성화에게도 아무에게나 쉽게 보여줄 수 없는 어두운 면이 있었다. 그런데 밝은 성화이든 우울한 성화이든 감싸줄 수 있는 사람은 진호밖에 없었다. 둘은 초등학교부터 꼭 붙어 다녔다. 성화를 짝사랑하던 여자애들이 성화와 조금이라도 더 친해지려고 항상 말수가 적은 진호에게 다가오고는 했다. 성화와 성격이 정반대인 진호는 친구가 별로 없으면서도 친구 사귀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이어폰은 꼭 수업 시간에만 빼며 진호는 그렇게 스스로 진입장벽을 만들었다.
공학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남중, 남고를 다녔는데도 학교 밖에서도 인기가 많았던 성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서 학교 친구들도 싹 바뀌었을 때도 성화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어딜 가나 성화를 따라오듯 줄줄이 나타났다. 성화는 항상 진호가 절친이라 자기와 잘 되려면 진호한테 잘해야 한다고 말하고는 했다. 그러고는 항상 자기에게 고백하는 사람들을 거절해 달라고 진호에게 부탁했다. 진호는 거절을 잘하지 못했지만, 성화를 위해 수백 명에게 성화의 거절을 전달해주었다.
진호는 성화와 그렇게 친했는데도 아직 자기가 퀴어라는 것을 성화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물론 진호가 혼자만의 일기를 쓴다는 것도 알려주지 못할 것이었다. 성화를 좋아하고 짝사랑하는 마음을 겉으로는 숨기면서 일기장에는 그런 생각을 솔직하게 다 써놓았는데, 만약에 성화가 그 부분을 읽어버리면 무슨 생각을 할까? 기독교인 집안에서 자란 성화가 퀴어인 친구를 얼마나 더럽다고 생각할까? 게다가 그 친구가 성화랑 연애하는 것을 상상했다고 하면 기분이 얼마나 더러울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옷장에 숨어있는 진호는 몹시 두려웠다.
원래 친구가 비밀을 말해주면 친구 관계가 더 단단해진다고들 했다. 하지만 진호는 성화에게 커밍아웃을 하면 그 관계가 끝이 날까 봐 항상 두려웠다. 기독교인 친구가 진짜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10년 동안 간직해왔던 관계를 버릴 용기가 없었다. 진호가 성화 말고도 다른 친구들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터놓았다면 믿을 수 있는 친구가 한 명이라도 더 생겼겠지만, 그렇지 못했기에 남중 남고를 다니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커밍아웃이 어려워졌다. 일기장에 있는 진호의 진정한 모습으로는 일기장 밖으로 나갈 기회가 없었다. 진호는 겉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으로만 살아가기로 했다. 친구나 가족 대신 진호가 믿을 수 있는 존재는 일기장뿐이었다.
4층은 어딘가 모르게 애매한 높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타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었고, 그렇다고 계단으로 다니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진호는 이 건물에 사는 사람을 피하려고 항상 계단으로 오르내렸다. 예전에 다녔던 학원으로 무심코 걸음을 옮기다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을 발견했다.
“○○편의점 알바 구함. 연락 010-××××-××××”
아르바이트 광고를 본 진호는 기쁘면서도 겁이 조금 났다. 전화를 걸어 점장과 약속을 잡았다. 미성년자라서 월급을 많이 주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래도 일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신나서 열심히 하겠다고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점장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일을 가르쳐주기 위해 편의점 카운터로 나갔다. 진호는 친절한 점장으로부터 포스기를 쓰는 방법부터 점포를 청소하고 정리하는 것까지 배웠다. 이렇게 진호는 편의점 알바를 시작하게 되었다.
“어서 오세요!”
출입문 벨소리가 울리자 진호가 인사했다. 그 순간 익숙한 얼굴과 눈이 마주치면서 진호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성화였다. 진호는 성화가 아직도 그 학원에 다닌다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다. 그래서 성화와는 여기서 마주칠 일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첫날에 마주치고 말았다.
“계산 도와드릴게요.”
두 사람은 필사적으로 서로 모르는 척했다. 오늘도 성화는 바나나 우유를 마신다. 여전했다. 진호가 계산하는 동안 성화는 편의점에 같이 온 친구들과 즐겁게 떠들다가 이윽고 나가려 한다.
“안녕히 가ㅅ…”
“어, 저기요!”
진호는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모든 기억이 쏟아질 듯 진호에게 생생하게 돌아왔다. 성화와 친구로 지내던 마지막 날. 그날 둘은 진호 방에 같이 있었고, 성화는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숙제가 너무 어려워서 절대 못 풀 것 같으니 진호가 제발 풀어달라고 징징대던 성화는 책상과 벽 사이에 무언가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해버렸다. 호기심이 생긴 성화는 진호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동안 진호의 초등학교 6학년 때 일기장을 꺼냈다. 지금까지 진호의 사생활을 존중해왔던 성화가 호기심 때문에 한순간 친구를 배신하고 만 것이다. 단 한 번도 말해주지 않고 숨겼던 일기장이라 성화도 말 적은 친구의 마음속을 알고 싶었던 것이지.
성화는 진호의 일기를 읽고 진호가 성화를 짝사랑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동성애가 싫은 것보다 진호가 더 싫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자기와 연인 관계를 원하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화는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지만, 진호가 동성을 좋아하는 것이 낯설고 두려웠다.
그때부터 성화는 진호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성화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오늘은 점심 같이 못 먹는다고 하거나 은근슬쩍 학원을 같이 가지 않으려 하는 것을 보며 진호도 성화가 자신을 멀리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말 없는 진호는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성화에게 왜 자기를 피해 다니는지도 묻지 못했다. 성화는 진호 대신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같이 다니는 친구들에게 진호가 게이라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그 탓에 학교에서 진호에 대한 인식은 성화의 친구에서 게이로 바뀌고 말았다. 다행히 진호가 다니는 남고에서는 일진 같은 것이 없어 괴롭힘당할 일은 없었지만, 진호는 매일 등하교 길에 쏟아지는 친구들의 시선을 느껴야만 했다. 누가 보면 이것이 사고(事故)일지도 모른다. 이 사고(事故)가 없었다면, 진호가 솔직하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공부에만 집중하던 진호는 이제 주변 눈치도 봐야만 했다. 그날부터 성화와 진호는 더는 친구가 아니었지만, 성화라는 사람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혹시 빨대 하나 주실 수 있나요?”
아, 성화가 또 빨대를 안 챙기고 나갈 뻔했다.
퇴근해서 아파트 빌딩으로 돌아온 진호가 옥상으로 향한다. 가출하기 전에 살던 집도 비록 어느 아파트 빌딩에서 콘도였지만, 이 10층 건물 옥상에 서 있으면 세상에 홀로 남은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진호는 하늘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구름 한 점도 없는 날이면 더 좋다. 왜냐하면 그때의 하늘은 진호의 사고를 다 쏟아낼 수 있는 일기장 한 장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역시 하늘에 구름이 한 점도 없었다. 마치 그날처럼.
진호가 드디어 학교에서 자기가 게이라는 소문이 돈다는 사실을 알게 되던 날, 발코니에 서서 하늘을 보다가 눈을 감고 말았다. 소문 낸 사람을 찾아다 혼쭐을 내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고, 소문의 내용이 틀린 건 아니니까 진호가 부정하고 싶어도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에 부모님이 조퇴하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진호의 방에서 무얼 찾는 듯 한참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리다가, 그 뒤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진호는 이미 부모님이 자신의 일기장을 찾았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윽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그 순간 진호는 자기의 사고인 만큼, 진호만의 세계에 갇혀있었다. 상상 속에서 진호는 서울 퀴어퍼레이드에서 사랑하는 애인과 손을 잡고 행복하게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비록 상상이라도 그 순간만큼 진호가 행복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상상 속에 있어도 부모가 현실에서 하는 말이 들려왔다.
“너 어떻게 이런 죄를 지을 수가 있어? 우리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대체 왜 그랬어. 뭐가 잘못된 거야?”
“안 되겠다. 너 이대로 있으면 인생 망해. 엄마아빠랑 병원 가서 치료 받자.” 진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부모의 실망한 모습을 뒤로 한 채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짐을 싸서 집을 나갔다.
상상을 벗어나 얼굴에 흐르는 식은 눈물을 닦았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가려진 진호가 1층에서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다. 흐릿한 시야 너머 그 모습으로부터 마치 진호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진호의 깊은 내면에 숨어있던 사고들은 이제 죽어가고 있다. 진호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묻은 것처럼. 진호의 사고는 한때 일기장 속에 묻혀있었지만, 이제 아무도 못 찾을 정도로 깊이 묻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