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일

낙뢰천
May 6, 2022

저질러버렸다

속옷도 안 입은 채 침대에 누워 있으려니 맨살에 스치는 이불의 감촉이 낯설었다. 땀이 식자 은근히 춥기도 했다. 일단 화장실을 다녀왔다. 아랫도리가 화끈거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기분 탓이려니 했다. 상대는 이미 곯아떨어진 뒤였다. 뭔가 재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안 하느니만 못한 징그러운 멘트나 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얌전히 자빠져 자주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여전히 취기가 가시지 않았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평소보다 과음한 탓이었다. 부모가 알면 뭐라고 할까. 첫 경험의 생경함을 곱씹는 대신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귀찮다고 연애도 안 하던 딸이 남자를 자취방으로 불러 술에 잔뜩 취한 채 사고를 치다니. 물론 부모가 뭐라 하든 알 바 아니었다. 술의 힘을 빌리기는 했지만 스스로 선택하고 합의한 일이었다. 동기는 순전히 호기심이었다. 콘돔도 썼겠다, 떳떳하지 못할 건 없었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사실은 일을 치렀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자신의 치부를 훤히 드러낸 채로 정신없이 자고 있는 상대를 보고도 그랬다. 보고 있자니 어쩐지 속이 거북해져 이불을 덮어주었다. 이 상황이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진짜로 내가 이런 짓을 했다고? 이 모든 상황이 마치 찝찝한 꿈만 같았다. 그렇지만 어느덧 다음 날로 넘어가 버린 날짜와 새벽 2시가 넘은 시각이 허옇게 띄워진 휴대폰 화면이, 지금 이 상황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을 무심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아까의 느낌을 떠올려봤다.

몸이야 달아올랐지만, 생각보다는 재미없었다. 그렇지만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기분은 정말이지 이상했다. 살갗과 살갗, 점막과 점막이 서로 맞닿고 뒤엉키는 감각은 누가 뭐래도 진짜였다. 입술, 목덜미, 가슴, 허벅지, 사타구니를 휩싸던 느낌이 떠올랐다. 자신의 몸이 이렇게까지 끓어오르는 살덩어리라고 느껴진 것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무언가 선을 넘었다는 짜릿함과 동시에,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나는 진짜 무성애자가 맞는 걸까. 안 해봐서 몰랐던 것을 지금까지 부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만족스럽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진심이었던 상대에게 맞춰 나름대로 즐기긴 했지만, 유성애자들이 열광하는 그런 느낌에 결코 동참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단지 생식기와 생식기를 서로 맞대는 행위인데, 이게 뭐라고 사람들은 그렇게 열광하는 걸까. 신음을 흘리면서도 계속 그런 생각을 했었다. 굳이 환불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딱히 재구매하고 싶지는 않은 이 기분. 혼란스러웠다.

예전부터 섹스 이야기만 나오면 호들갑을 떠는 유성애자들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는 이해하려는 시도를 포기한 상태였다. 그래서 평생 섹스 같은 건 안 하고도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 아직 해보지도 않았는데 너무 성급하게 결론 내리는 거 아니야? 무성애자로 커밍아웃했을 때 이런 반응을 보이던 이성애자 친구들을 떠올렸다. 그럼 너는 동성이랑 자보지도 않았는데 네가 양성애자가 아닌지 어떻게 아는데?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억지로 삼켰던 적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

그런 생각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섹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이제는 해봤더니 그거 정말 재미없더라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멍청한 혐오자들이 순순히 그 말을 들어줄 리가 없다는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들은 분명히 상대랑 사고 쳤다는 사실을 알면 이렇게 말할 터였다. 거봐, 섹스했으니까 너 무성애자 아니지! 섹스하면 무성애자 자격이 박탈이라도 되는 걸까? 머릿속에 누군가의 손이 사단법인 한국무성애자협회에서 발급한 무성애자 자격증을 우악스럽게 잡아 찢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면 세상의 모든 무성애자는 사실 알고 보니 죄다 정조대라도 차고 다니는 걸까. 생각해보니 그것도 꽤 재밌을 것 같았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상대가 다음에도 또 하자고 하면 그때는 좀 고민을 해보겠지만 말이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게 좋을까. 아니, 괜히 이야기하고 다녀서 피곤한 일을 더 만들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고작 섹스 하나 했다고 또 무슨 죄지은 것처럼 숨길 건 또 뭔지. 슬며시 부아가 치밀었다.

사실 그들은 원래 그래왔다. 그동안 수없이 되묻고 고민하면서 쌓아온 사고의 산물을 자기들 멋대로 깔아 뭉개려고 들었다. 고작 누군가와 몸 좀 부빈 걸로 정체성이 순식간에 짠! 하고 바뀐다는 식의 주장은 우습기 짝이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그들은 계속 헛소리를 할 터였다. 그렇다면 사실 사고 좀 쳤다고 해서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랬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그래, 달라질 건 없었다. 사고라는 단어도 이 일에 갖다 붙이기에는 너무 거창한 단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취 때문인지 머리가 좀 아픈 것만 빼면, 어제의 자신과 오늘의 자신은 별반 다른 점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저 어쩌다 보니, 삶에 조금 재밌었던 첫 경험이 더해진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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