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응자의 감각

스타더스트
May 6, 2022

다시 『퀴어, 플라이』에 글을 쓰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제는 온종일 울었다. 울다가, 잠들었다가, 깨서 우울한 상태로 넋 놓다가, 다시 울다가. 두 번은 친구들한테 전화해서 속상한 일들을 털어놓았지만, 뭔가가 풀리지 않았다. 내 인생이 다 하나의 커다란 사고가 된 것 같았다.


충동적으로 『퀴어, 플라이』에 글을 쓰겠다고 연락을 했는데, 기고하려고 한 글이 이 글은 아니다. 나는 『퀴어, 플라이』를, 그리고 퀴어 동아리를 어느 정도 떠나야겠다고 결심을 했었고, 글은 여전히 쓰고 싶었기 때문에 다른 모임에서 문집 활동에 참여했었다. 그곳의 사람들은 페미니즘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고, 나는 남성혐오에 대한 글을 썼다. 초반에는 남성혐오는 페미니스트들 사이의 가벼운 농담으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많은 소수자 혐오를 동반하고 있기 때문에 정당하지 못하다는 내용을, 뒤에는 ‘여자는 괜찮다’라는 남성혐오의 태도에 대해 느끼는 불편감에 대한 내용을 적었다. 내가 ‘여성’이라는 이름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며, 여성은 안전하다는 식의 태도에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얘기를 했었다.

회의는 비대면으로 진행되었지만, 그 시간에 같은 문집에 글을 쓰는 친구와 함께 있었다. 그 친구는 나의 글을 이미 읽어봤을 정도로 친밀한 사람이었으며, 우리는 내 글이 어느 정도 논란이 될 거라는 걸 이미 예상하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서로에게 쓴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던 회의에서 처음으로 나온 부정적인 피드백을 보며 깔깔 웃었다. 물론 공격적인 내용은 없었다. 다들 예의 바르게 나의 글에서의 방어적인 태도와 위험한 표현들, 그리고 폭력적일 수 있는 사례들을 지적해주었다. 글을 많이 다듬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느 부분을 다듬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모호했고, 지적하고 싶은 혐오의 내용을 조금 오독한 분도 계셨다. 하지만 기분 나쁠 만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아마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기분이 상당히 상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깔깔 웃을 때조차 상기된 내 얼굴을 숨기려고 했던 것 같다.

그렇다. 이 문집에 글을 실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퀴어, 플라이』에 기고하려고 했다. 비겁한 생각이다. 지금으로서는 당당하게 내 글을 밀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남들의 피드백을 받아들이지 않는 독단적인 생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가 글을 잘 못 써서 사람들이 반응이 좋지 않았던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기에 공격받은 기분이었을 것 같다. 그럴 만한 글이었다. (덧: 결국 그쪽 문집에서는 글이 실리게 되었고, 나는 이때 사람들이 실제로 한 피드백에 비해 과민반응을 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 나는 페미니스트들의 모임에 가서 그런 공격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글을 던지고 오지 말았어야 했나? 예의 바른 사람이라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예의를 몰라서 좀 부적절한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 글을 가져온 것 자체가 일종의 사고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 내 부적절감은 어디에 얘기할 수 있을까. 어디에, 얼마만큼 얘기하는 게 허용되는 것일까.

다만 이 사건 때문에 온종일 우울했던 것은 아니다. 며칠 전, 애인은 내가 조금만 더 좋은 환경에 있었어도 학과 공부를 더 잘 따라갔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이공계 중에서도 특히나 과학고나 영재고 출신 학생들이 많은 학과에 속해 있고, 공부를 전혀 따라가지 못해 학점이 안 좋다. 지금까지 나는 내가 과학고나 영재고 출신 학생들보다 이 분야에 재능이 없어서, 혹은 노력을 안 해서, 혹은 정신병이 심해서 그런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종종 나의 과제를 도와주는, 같은 학과에 다니는 영재고 출신인 내 애인은 내가 더 차근차근 가르쳐 주는 커리큘럼을 따를 수 있었다면 잘했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어차피 대학에서 이렇게 어렵게 가르쳐 주는 것은 이런 방식으로 가르쳐도 잘 따라오는 학생들이나 학계에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냐. 내가 설령 차근차근 가르쳐줘서 잘했다고 해도 나 같은 과학자는 필요 없어. 그런데 애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잘 따라오는 애들은 천재라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받지 못한, 차근차근 가르쳐 주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런 거 사실 다 학원에서 가르쳐 준다고. 과고 애들은 그거 다, 학교 아니면 학원에서 배워 오는 거라고.

순간적으로 화가 났다. 그래서 아무 잘못 없는 애꿎은 애인한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애인은, 어떻게 해야 했다는 건 아니고… 하고 답하려다가 얘기를 꺼내서 미안하다고 했다. 물론 그 애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억울했다. 곧바로 나의 억울함과 속상함을 다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기분이 상했다.

같은 날 저녁에 친구를 만나서 이 얘기를 꺼냈다. 공부는 다 신분인 것 같다는 과격한 말도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선행한 애들이나 과고를 가고, 과고를 가야 대학 공부 선행을 하고, 과고 안 갔음에도 어찌어찌 서울대에 와 봤자 과 공부 하나도 못 따라가고, 이게 다 그렇게 어릴 때 정해지면 어떻게 신분이 아니냐는 얘기를 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나는 내가 그런 코스를 밟지 못한 게 아쉽거나 억울한 건 아니다. 억울한 건 그동안 내가 내 노력이나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고 자책하고 힘들어서 정신과까지 다니던 나날들이 너무 아까워서였다.


나는 어린 시절을 외국에서 보냈다. 내 공부 때문에 유학을 다녀온 건 아니고, 부친의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갔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한국에 들어왔을 때 나는 겨우 초등학교 1학년 국어책을 떠듬떠듬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한국말을 못 했다. 당연히 학교 수업은 하나도 따라가지 못했고, 친구도 사귀지 못했다. 외국에서 나는 언어와 수학을 잘하는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2학년 과목을 다 떼서 이례적으로 한 학년을 건너뛰어 바로 3학년으로 들어갔을 정도였고, 나는 영재라고 불렸다. 아마 한국에서 쭉 나고 자랐다면 당연하게도 초등학교 때부터 선행하는 코스를 잘 밟아 안전하게 과고를 거쳐 서울대를 갔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한국에 돌아와서 적응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썼다. 다른 것들을 거의 하기 힘들 정도로 적응하는 데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어제 아침에 애인과 한 대화를 언급하니 엄마의 입으로 들은 이야기다. 아는 얘기였지만 동시에 전혀 모르는 얘기였다. 내가 영어권 국가에서 오래 살다가 온 사실은 나를 엘리트로 만든다.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사실이다. 대학에 오기까지도 부모와 선생님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는 청소년기에, 정석적이지는 않지만 나름의 탄탄대로 엘리트 코스를 거쳐서 상당히 혜택받은 거로 생각했다. 나는 좋은 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얻은 것들이 너무 많고, 그런 것들은 나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며, 그래서 감사해야 한다고, 아니 오히려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어떤 면에서는 맞는 얘기다. 하지만 그날따라 내 인생은 잘 닦인 고속도로가 아니라 복잡한 교통사고처럼 느껴졌다.

외국에 살다 온 경험을 할 수 있어서 복 받은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엄마가 식탁에서 울고 있는 나를 보고, 네가 그런 경험을 한 것도 너에게 많은 걸 줬을 거야, 라고 말했을 때 그건 전혀 다른 의미로 느껴졌다. 나는 내가 얻은 게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영어 실력 정도는 없어도, 아니 한국에서 교육받아서 얻을 수 있을 정도로만 있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얻은 게 뭐가 있는데, 하는 나의 공허한 질문에 엄마는 답했다. 부적응자의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 거라고.


부적응자의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능력. 그건 그날따라 저주처럼 느껴졌다. 나는 평생을 적응하는 데 보낸 것 같았다. 그래서 어디에도 적응할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에서는 아무리 지내도 외국인이었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새로운 언어, 교육과정, 문화, 교우관계가 다 너무 어려웠다. 청소년기에 제대로 친구를 사귀어 본 기억이 없다. 대학에 와서 나는 오히려 외향인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을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너무 자연스럽게도 나는 여자애들 사이에서도 적응하지 못했다. 여중 여고를 다니고 은근히 왕따를 당하면서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자매애’로 ‘연대’하는 여성들 사이에 끼지 못하겠다. 나는 ‘여성’이라는 집단에 하나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겠다.

내가 남자였으면 페미니스트가 됐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더 외로워졌다. 남성 페미니스트와 여성 페미니스트에게는 요구되는 바가 다르다. 자기 일임에도 나서는, 타인의 권리도 자신의 권리만큼 중요하게 생각하는, 타인이 당한 부당한 일도 자기 일처럼 분노하는 남성 페미니스트. 여성으로서의 당사자성을 가지고 자기 얘기를 하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여성들 간의 연대를 하는 여성 페미니스트. 그 두 자리 중 내가 갈 곳은 없었다. 친구한테 전화해서 여자가 너무 싫다는 과격한 말을 내뱉었다. 여자가 너무 싫어. 철저히 배제적이고 자신들만의 연대가 너무 중요한 나머지 내가 끼어들 틈도 없게 만드는 여자가 너무 싫어. 내가 속하지 못하는 여성이라는 집단이 너무 싫어. 나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어.

부적응의 감각을 평생 앓아온 사람은 그 감각에 너무 익숙하고, 또 예민하여 모든 곳에서 부적응한다. 나는 불편함을 너무 잘 알아차린다. 내가 속해 있는 집단이 어떤 곳인지와 관계없이 조금이라도 배제 받는, 혹은 배제 받을 가능성이 있을 듯한 느낌이 들 때 몸서리가 쳐진다. 그래서 나는 어떤 곳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한다. 퀴어 집단에조차 나는 잘 속하지 못했다. 퀴어들 사이에 있으면서 느낀 불편한 감각에 대해서 수도 없이 말했다. 나는 더 이상 퀴어일 수 없을 것 같아서 퀴어 동아리 활동을 줄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다른 곳이 아닌 퀴어 동아리로 돌아오게 된 이유는, 적어도 내가 불편함을 지적했을 때 가장 잘 받아준 집단이 퀴어 집단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퀴어, 플라이』에 글을 썼을 때는 사람들이 그렇게 공격받은 듯한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는 아니더라도 많이들 부적응의 감각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렇게 다른 문집으로 나아갔으면서 다시 돌아오는 행동이 스스로 비겁하게 느껴지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넘어가 줬으면 좋겠다. 너무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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