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게생각하자

블랑카
May 6, 2022

~바르게생각하기운동본부~

내가 나온 고등학교는, 성소수자와 페미니즘에 대한 조롱과 반대 표현이 일상이었고 대부분의 구성원이 그에 동조하는, 그런 곳이었다. 남성 위주로 구성된 집단 중에 그렇지 않은 집단이 어디 있겠냐마는. 중학교 때 바이섹슈얼로 정체화했고, 고등학교 내내 자신의 젠더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 나는 페미니즘에 대한 조롱에는 동조했지만, 성소수자에 대한 조롱에는 동의하지도 동조하지도 않았다. 이미 나는 거기서부터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로 시스헤테로 남성들의 호모소셜과 균열을 만들고 있었다.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나는 나의 사고를 글로 옮기곤 했다. 그 글은 혼자 쓰고 혼자 보기도 했지만, 지인들과 연결된 페이스북에 써 올리기도 했다. 그 페이스북 계정은 고등학교 때 인맥을 기반으로 만든 계정이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나의 글들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공격을 당했다. 공격하는 이유와 방식도 참 다양했는데, 그냥 댓글로 ‘그건 좀 아니지 않나’ 하고 시비를 걸고는 토론을 좀 하려고 하니 싸우게 되는 것 같다며 댓글을 지우는 경우가 몇 번 있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여성/퀴어에 대한 혐오와 억압에 관한 글을 인용하니 “나는 대학 진학할 때 서울대와 카이스트를 고민했는데 서울대를 가야 한다는 부모님의 압박을 무시하고 카이스트에 진학했다”면서 소수자와 약자에게 가해지는 억압들 역시 개인이 무시하면 되는 수준의 것들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여성이나 성소수자 관련 의제에 관한 의견을 내비칠 때마다 말도 안 되는 시비와 공격들을 받으니 이젠 글을 써 올리지도 않고, 올린다고 해도 믿을 만한 사람만 몇 있는 사적 공간에 올린다. 언제 어떻게 들어올지 모르는 그러한 공격들을 걱정하고 대응하는 것은 지나치게 피곤하고 지치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고 주장하고 결론짓는 것들이 전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 공격을 가한 그들도 스스로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나와 그들의 생각에 차이를 생긴 이유는 나와 그들이 다른 삶을 살고 다른 경험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스 헤테로 남성 호모소셜에 동화되어 주류의 구성원으로서 호모소셜의 한정된 정보만을 접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경험이 틀렸는가? 그들은 거짓된 삶을 살았나? 이런 질문을 떠올리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물론 그들의 삶과 경험이 거짓이 아니라고 해서 나를 비롯해 다른 퀴어들과 소수자들이 차별받는 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혹여나 틀렸으면 어쩌지,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두려움이 엄습한다.

나는 사고의 전환을 크게 한 번 겪었고 그 과정은 지나치게 아팠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가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경험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졌다. 나는 내가 틀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 싶음에도 내가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것이 피곤하고 두렵다. 스스로가 추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생각을 할까? 그렇다고 하면 그 피곤함과 두려움을 애써 무시하고 살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그에 맞서 싸우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면서 살아가는 것일까.

안티페미니즘적 사고를 했던 고등학생 때에는 이렇게 고민하는 것이 피곤하지 않았다. 자신이 잔실수는 할지언정 대체로 합리적인 사고를 하며, 격한 토론이 벌어져도 당당하게 나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건 흔히 말하는 ‘꽃밭’에서 자랐기 때문이었다. 주변에 비슷한 사람이 많으니 주변 사람들과 이슈들에 대해 말할 때 비슷하고 한정적인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고 그 안에서만 놀던 우물 안 개구리였던 것이다. 다른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정보와 의견을 접하니 부드러운 잔디밭 위에만 부딪혀 본 나의 멘탈은 시멘트 바닥에 떨어진 달걀처럼 박살 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나는 이후로 늘 편안하게 몸담을 집단이 없었다는 것이다. 먼저 헤테로가 아니었기에 헤테로 남성 호모소셜에 녹아들지 못했고, 바이섹슈얼이었기에 게이들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으며, 논바이너리였기에 (바이너리) 트랜스젠더들에게 온전히 공감할 수 없었고, 페미니스트라고 하기에는 세간의 페미니스트들에 비해 스스로가 여성의 권리를 항상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많은 사람이 말하듯 개인에게 완벽히 들어맞는 집단이나 정체성은 존재할 리 없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상황에 맞게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다. 어디에 속하려고 하든 정도의 차이일 뿐 결국 위화감은 느껴지기 마련이다. 다른 퀴어들도 많이 느끼는 부분이겠지만, 어쨌든 결론은 내가 심리적으로 동화될 수 있는 사람과 집단이 점점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사람들이 성소수자를 (적극적 혐오를 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타자화하고 희화화하는 상황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내가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것에도 화가 났다. 그 타자화는 대체로 그들의 의도가 아니며 보통은 그들의 무지와 성소수자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사회 분위기에 그대로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을 악마화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일일이 그것들을 지적하고 정정하는 것도 역시 두렵고 피곤한 일이다. 결국, 내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해도 바뀌는 것이 거의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 너무 견딜 수 없었다.

내가 피해를 받음이 확실한 상황에서도 온전히 나 자신만을 위해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 분하다. 그리고 스스로가 주변의 사람과 상황들을 애써 무시하며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나를 화나게 한다. 견딜 수 없이 분하고 울고 싶은 순간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와 동일시되지 않는 타인의 삶도 나와 똑같이 존중받고 대우받길 원한다. 이 바람은 나의 어떤 커다란 도덕적 신념이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내가 인식하는 범위 내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처사들을 나는 애써 무시하지 못하는 사람이며 그에 공감하고 같이 고통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전에, 지인 건너 지인이 트위터에 써 올린 글 하나가 인상에 깊게 남아서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자세히는 적지 못하겠지만, 그 내용은 이랬다. “퀴어들이 어떻게 ××당원일 수 있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당의 행보가 있으니 이해는 해요. 하지만 우리가 한국 싫고 헬조선이라고 해도 막상 한국 떠나서 살기 쉽지도 않고, 한국 떠나는 사람도 별로 없잖아요. 그래서 한국 사회 바꾸려고 노력하는 거고요. ××당이 싫더라도 당이 바뀌기를 원해서 안에서 노력하는 분들이 계셔요. 그래서 계속 바뀌고 있는 거죠.”

선善과 선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최근에 퀴어 이론과 관련된 책을 몇 접하고 나서는 우리의 모든 행동은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갖고 있으며 우리는 사회를 구성하는 수많은 맥락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머리로 이해하고 몸으로 느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의 행동과 타인의 행동 중 어느 쪽이 선일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맥락에 따라 달리 해석되며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고, 어떤 행동을 해도 내가 온전히 선할 수 없다는 사실에 가끔은 무기력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나만이 느끼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하고 바른 삶을 살기를 포기하는 건 나 자신이 용납하지 못할 것 같다. 앞서 말했지만 이건 알량한 정의감 같은 게 아니라, 그저 윤리적 정합성을 내려놓는 나 자신을 스스로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고민한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나 혼자만 나의 윤리적 정합성을 지킨다고 해서 사회가 ‘선한’ 방향으로 조금이라도 달라질까. 나의 행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자만하는 것은 아닐까. 개인이 일일이 고려할 수 없는 수많은 맥락 속에서 선한 방향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봐야 나만 그 짐을 짊어지는 것이 아닐까. 수많은 무의식적 악의들 속에서 의식적인 선행을 외칠 때 그 작은 외침이 사람들에게 들리기는 할까.

많은 의문이 들지만 그럼에도 쉬운 포기를 택하고 싶지는 않다. 요즈음 들어 다양한 일을 겪고 다양한 사람을 만났고, 그 치열한 고민들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가치관을 나의 것과 양립시킬 수 있다는 것을 차츰 배워가고 있다. 그러니 조금은, 아주 조금은, 나의 행동들이 나나 내 주변을 조금씩이나마 바른 방향으로 물들여갈 수 있다고 믿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나의 삶과 고민을 글에 녹여내는 이 순간만큼은 그렇게 믿는 것이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느낀다.

도로 위의 표지석, '바르게살자'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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