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반자가 필요해
지난주에 세면대 온수관이 터졌다. 난데없이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푸쉬–’ 하는 소리에 깜짝 놀랐지만, 곧 침착하게 밸브를 찾아 잠갔다. 문제는 세면대와 샤워기가 연결되어있어 당분간 온수 샤워를 못 하게 되었다는 거였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라서 아무렇지도 않게 집주인에게 문자를 보내고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수리 기사가 내일 오후에나 온다는 답장을 받았다.
5년 동안 이 작고 오래된 방에 살아오면서 온갖 시설이 망가졌었다. 처음에는 형광등 안정기가 나가버리는 바람에 아예 LED 등으로 바꿨다. 정신없이 살다 보니 고장 난 줄도 몰랐던 화장실 환풍기도 어쩌다 보니 교체가 되었다. 부엌 개수대 수도꼭지에 연결된 세탁기 호스가 빠져서 하마터면 그 조그만 부엌이 물바다가 될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생각해보니 화장실 수도꼭지도 물 막는 부분이 고장이 나서 한 번 바꾼 것이다. 이제는 온수관도 고치는 김에 탈수 소음이 엄청난 세탁기도 봐달라고 할 참이다.
자취를 오래 하다 보니 이제 화장실 전구 교체같이 세입자가 알아서 해야 하는 건 혼자서도 척척 할 줄 안다. 어제도 낡은 옷장 서랍 손잡이가 덜렁거리기에 드라이버로 열심히 조여 놨다. 경험상 인터넷 공유기를 포함한 전자기기 대부분은 문제가 생겼을 때 일단 전원을 껐다 켜면 약 80%는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해결하지 못하는 크고 작은 일이 있다. 특히 세상 사람들 보시기에 대충 여자처럼 생겼으면, 살면서 맞닥뜨리는 아슬아슬한 일이 더 많아진다. 다행히도 나는 그동안 저녁에 누가 골목에서 쫓아온 것 빼고는 큰일을 겪은 적은 없었지만, 외출할 때 불을 켜고 나가는 습관은 이 집에 처음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쭉 유지하고 있다.
나는 남들에 비해 과도하게 불안을 느끼는 편이고,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온갖 사고에 대한 걱정과 망상이 나를 괴롭힌다. 사실 나도 이게 몹시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기질이라는 것은 잘 안다. 화재, 지진, 핵전쟁, 심정지 같은 일은 물론 평소에도 철저히 대비해야 하지만, 내가 하는 행동은 철저한 준비라기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불안해하기만 하는 것에 가까웠다. 어쨌든 이렇게 여러 안전 문제에 관심이 생겨 열심히 찾아보고 나니,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언젠가 교양 강의 교수님이 제럴드의 게임(Gerald’s Game)이라는 영화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1992년에 출간된 스티븐 킹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인데, 수갑을 찬 채로 섹스를 하려다 남편이 눈앞에서 심장마비로 죽어버리는 바람에 홀로 남겨진 아내가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였다. 교수님이 그 영화를 보고 나서 ‘Siri를 불렀다면 어렵지 않게 구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이는 바람에 피식 웃었던 기억이 있다. 일단 아무도 없는 별장에서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는 것 자체가 현실에서 좀처럼 일어나기 힘든 상황이기는 하지만, 상상해보면 충분히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스티븐 킹의 상상력은 참 대단한 것 같다.
그런데 얼마 전에 고장 난 화장실 문고리를 고치다가 그 안에 갇히는 바람에 애타게 빅스비를 불러 119에 구조된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정신이 퍼뜩 들었다. 혼자 살다가 화장실에 갇혀버리는 그런 상황이 마냥 말도 안 되는 것만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화장실 문 앞에 자전거가 넘어져 그 안에 갇혔는데, 마침 여행을 떠날 예정이라 아무도 찾지 않아 홀로 세상을 떠난 사람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지 않은가. 실제 사람의 죽음은 마음 아프고 돌이킬 수가 없다.
아무튼 이런저런 아찔한 상황들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일어날 확률이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한 번 일어나면 꼼짝없이 좆되는 그런 사고. 그리고 나는 항상 그런 사고에 대해 굳이 사서 걱정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내가 쓸데없이 과잉불안에 시달리는 것도 있지만, 지금 혼자 살고 있다는 점이 그런 불안을 더욱 증폭시키는 것 같다.
나는 재수학원에 다니게 되면서 학사에 들어가 난생처음으로 혼자 살게 되었다.처음에는 몹시 허전하고 쓸쓸했다. 학원이 끝나고 늦은 밤에 내 방으로 돌아오면 나를 맞아주는 것은 적막뿐이었다. 문득 가족들 목소리가 듣고 싶어져서 툭하면 집으로 전화를 걸고는 했다. 학원에서 친해진 친구에게 외롭다고 했더니, 친구가 자기는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에 살아보니 딱 한 달만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그랬다. 정말 한 달이 지나니까 그때부터는 괜찮아졌다. 여전히 정서적 지지를 바라며 집에 전화를 걸기는 했지만, 이제는 혼자 지내는 것이 즐거웠다. 자습이 없는 주말 저녁에는 혼자 빙수도 먹어보고, 가끔 학사에서 주는 식사가 질리면 편의점 도시락도 먹어보고, 명절 때는 숨도 돌릴 겸 혼자 놀이공원에 가서 즐겁게 놀았다.
그러고 몇 년이 지났다. 나는 어쩌다 보니 기숙사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고 지금까지 쭉 혼자서 자취하고 있다. 이제는 룸메이트가 없는 삶이 너무나도 익숙하다. 주말에 혼자 집안에 처박혀 뒹굴뒹굴하는 삶이 최고다. 그동안 외롭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어차피 이 세상에 나와 완벽하게 잘 맞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테니까. 온전히 내 맘대로 살 수 있는 이 시간과 공간이 나에게는 몹시 소중했다. 그렇게 혼자 사는 법을 체득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믿을 만한 누군가와 가까이 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몇 년 전에 갑자기 엄마가 허리를 삐어 꼼짝도 못 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수능이 끝나고 매우 한가했던 내가 엄마를 부축해서 병원까지 모시고 갔다. 만약에 혼자 있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물론 제일 좋은 방법은 휴대폰으로 나를 도와줄 사람에게 연락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당장 휴대폰이 있는 곳까지 기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 먹을 것을 사러 나가지도 못하고 며칠 동안 물로만 연명하게 될 수도 있다.
다행히도 나에게는 지금까지 그런 진짜 위험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혼자여서 가장 서러웠던 순간은 집에 가는 길에 버스 계단에서 넘어져 발목 인대를 다쳤을 때였다. 혼자 절뚝거리며 정형외과로 갔더니 난데없이 반깁스가 씌워지고 목발이 주어졌다. 목발을 짚은 채로 가방을 들고 언덕길을 올라갈 수가 없어서 난감했다. 절박한 마음에 그나마 친하던 동기들에게 전화를 걸어 도와달라고 하는데 문득 내 처지가 너무 처량해서 눈물이 왈칵 나왔다. 다행히 두 번째로 전화한 동기가 와서 내 가방을 집까지 들어주었다. 혼자 살 때 아프면 이리저리 힘들다.
이리하여 요즘은 ‘살아남기 위해’ 앞으로 같이 살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혼자 사는 기쁨을 만끽하되, 이제 그다음을 생각하는 단계로 넘어갔다는 느낌이다. 여기서 같이 산다는 것은 꼭 생활공간만 공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삶의 여러 순간을 서로 든든하게 받쳐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아예 결혼하는 것은 어떨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혼은 딱 질색이다. 편의를 위한 위장이라 할지라도 나는 내 호적(?)에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 게다가 내가 바라는 동거인은 룸메이트가 아니라 하우스메이트 정도쯤 되는 것 같다. 언젠가 생활동반자법이 생겨서 누군가와 동반자 등록을 하고 같이 살더라도, 각자 방은 하나씩 둔다는 게 내 철칙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여동생과 무척 친하니까 동생이랑 둘이 같이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원래부터 혈연관계인 사람과 지내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서로를 법적으로 보조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것저것 찾아보니 생각보다 이 나라는 법적인 배우자가 아니면 보호자로 인정하는 것조차 야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를 들어 내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이 없는 상태로 병원에 실려 와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하자. 그런데 병원 대부분에서 수술 전 동의서는 배우자와 존·비속이 모두 없는 경우에만 형제자매가 보호자로 서명할 수 있다고 안내하고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라면 몰라도, 부모님이 살아계시면 가까운 데서 연락받고 달려올 동생을 굳이 내버려 두고 아마도 멀리 계실 부모님이 와서 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나의 요즘 관심사는 생활동반자법이다. 생활동반자법은 꼭 혼인이나 혈연관계에 있지 않아도 서로에게 법적 보호자가 될 수 있는 관계를 말한다. 외국에는 이미 프랑스의 팍스(PACs, 시민연대계약)와 스웨덴의 삼보(Sambo) 등 여러 시민결합 제도가 있다. 개인적으로 결혼은 나에게 너무 무겁고 꽉 닫혀 부담스러운 관계고, 나는 혼인이라는 제도가 굳이 필요하지 않다(그렇지만 연대의 의미로서 동성혼 법제화는 지지한다).
누군가에게는 그게 뭐 중요한 건가 싶겠지만, 나에게는 이번 대선에 등장한 ‘연대관계인 등록제도’ 같은 공약이 무척 반갑다. 연대관계인 역시 의료·장례·돌봄 영역에서 친족이 아니더라도 보호자가 되어줄 수 있는 제도이다. 꼭 피가 이어지지 않아도, 결혼이라는 끈덕진 관계로 엮이지 않아도 살아가면서 우리는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 않는가. 나는 그 사람들과 내 삶을 나누고 싶다. 내 바람이 그렇게 막 거창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