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가에 날개 달기

어릴 때 사촌이 가지고 놀던 닌텐도 DS를 선물 받아서 신나게 놀던 기억이 있다. 정품 칩은 하나도 없었지만, 접속 불량인 R4 칩에 엄마가 뚝딱 깔아준 게임들로 열심히 놀았다. 칩을 교체하면서 놀다 보니 자연스럽게 바지 주머니에 넣고 까먹은 칩을 세탁기에 참 여러 번 돌렸다. 그때도 그랬는데, 지금은 덜하지만 가끔 실수로 주머니를 비우지 않은 바지를 세탁기에 돌릴 때가 있다. 동전, 볼펜, 핀 등 기계에는 정말 치명적인 잡동사니들, 그리고 가족한테 들키기 싫은 아이라이너 펜슬까지…

대학에 입학한 뒤에는 기숙사에 들어가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게 됐다. 물론 룸메는 있었지만, 어차피 서로 인사만 건네는 사이였기에, 거의 혼자서 지내게 된 느낌이었다. 덕분에 봄 입학 후 푸르러지기 시작한 관악산과 함께 내 마음속에도 여러 새싹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매년 찾아오고 돌아가는 계절이 내 입학을 기준으로 왕래했다는 말이 매우 자아도취여도, 어쨌든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다만, 내가 가꾸고 싶은 마음속 정원을 확실히 알고 있다면 모를까, 지금 당장은 뭐가 잡초이고 뭐가 꽃인지도 몰라서 그냥 골고루 물을 주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풀떼기들이 말도 안 되는 조합으로 섞여 있다. 무지개색 튤립 밭을 연상할 수도 있는데, 그냥 픽셀 하나하나가 다른 색인 .jpeg 파일에 비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기숙사에 입주하기 전에 옷장을 정리하고, 계절에 맞춰 새로운 옷도 사보고, 어색해도 일단 이것저것 다양하게 해보고 있다는 말이다. 화장도 시작했는데, 이걸 시작한 데는 또 다른 구체적인 이유가 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사진 즉석 편집 앱이 잠깐 유행했는데, 그때 내 친구들이 서로의 사진 속 성별을 마구 바꾸면서 놀았다. 그중 내 사진도 있었고 마음에 들어서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 그 사진 속 내 모습이 하도 마음에 들어서 머리도 기르기 시작한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주변인에게는 그냥 “전에는 머리를 밀었으니 이번에는 길러보겠다.”라고 변명하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화장도 시작했다. 근데 다들 하는 보습, 선크림, 파데 뭐 그딴 거 없이 나는 검정 아이라이너 과용으로 시작했다. 혼자서 사러 가기에는 너무 부끄럽고, 같이 가줄만한 친구 하나 없는 때여서 인터넷으로 주문. 아마 처음으로 인터넷 쇼핑을 하고 처음으로 택배를 받아본 경험이었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튜토리얼을 따라 거울에 비친 내 눈을 공부한 뒤 떡칠. “괜찮은데?”라는 오산을 하고 미팅에 나갔더니, 화장이 너무 진하다는 약간 치욕스러운 얘기를 들었다.

여름 방학 때가 돼선, 본가에 돌아가서 고등학교 친구들과 자주 놀러 나갔다. 끼리끼리 논다던가? 못 본 사이에 내 친구 중 절반이 커밍아웃했다. 정말 짧은 시간 안에 내 친구들은 달라져 있었고 멋있어졌었다. 그들의 멋있음에 뒤처지기 싫었고 나 또한 그들만큼 개성 있게 변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친구들을 만나러 나갈 때마다 어설픈 화장을 하고 나갔다. 이런 내 노력을 본 걔들은 아낌없이 칭찬해주었고 추켜세워 줬다. 고마운 친구들.

근데 이건 절대 우리 부모님께 들키고 싶지 않았다. 특히 내가 남자랑 사귄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날 죽이겠다고 한 아빠한테는. 그래서 차를 끌고 놀러 나갈 때마다 난 파우치를 챙기고 나갔다. 집에서 나와 골목에 차를 세운 뒤 백미러로 화장을 한 뒤 다시 시동을 걸고 갈 길을 갔고, 돌아오는 길에는 다시 골목에 주차해 화장을 지운 뒤나 집에 들어갔다. 골목에 들어간 이유는 동네에 사는 우리 부모님 친구분께 들키기 싫어서였다. 화장을 못하고 나가는 일은 있어도, 화장을 지우지 못 하고 들어가는 일은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 조수석에 있는 사물함에는 자동차 매뉴얼 아래 화장 제거용 티슈를 숨겨두었다. 어쩌다 부모님께서 약속 장소로 데려다 주시는 경우에는 차에서 내리고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뒤 근처 화장실에서 화장을 했다.

“얼굴에 뭐 좀 칠하는 걸 들키는 게 무서우면 그만두면 되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얼굴에 뭐 좀 칠했다고 자신감이 생겼고 내 얼굴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쌍꺼풀에 왜 그리들 집착하는지 이해하게 됐고 예쁜 화장을 한 사람이 눈에 들어오게 됐다. “아, 저 사람 눈 부럽다.”라고 생각하거나 “와, 저분 은색 아이라이너 미친 거 아냐?”라면서 내 친구들과 꺅꺅거리기도 했다. 얼굴에 뭐 좀 칠해서 펼쳐진 세계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씩 몰래몰래 화장하고 지우는 것이 능숙해져 갔다. 화장을 안 하는 친구 앞에서 화장하는데 “어떻게 눈을 찌르지 않고 그릴 수 있느냐”며 놀라워하는 반응에 으쓱거렸고 여성 친구들의 칭찬도 받을 정도가 됐다. 익숙해지니 화장한다는 것에 대한 긴장감도 풀렸다. 하지만 주체할 수 없는 내 덤벙거림과 건망증 덕분에 끝내 일을 냈다.

어느 날 엄마가 갑자기 방에 들어오셨다. 그러고서는 내가 모르고 세탁기에 돌린 아이라이너 펜슬을 돌려주셨다.

“야 이 녀석아,”라며 웃으신 뒤 그냥 가셨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웃으면서 그것을 건네 주시길래 나도 따라 웃었지만, 그 뒤로 한참을 고민했다. 평소에도 연필이나 펜을 세탁기에 돌리기도 하는데, 혹시 그냥 조금 이상한 펜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닐까? 아니면, 뭔지 아셔도, 그냥 과음한 친구 물건 들어주다 돌려주는 걸 깜빡한 것으로 생각하실 수도 있지 않나? 아니면 이미 알고 계시지만… 혹시 아무 상관 안 하시는 걸까? 왜 웃으셨을까? 내 건망증은 어디 가지 않아서? 사내놈이 화장품 들고 다니는 게 웃겨서? 어떻게 반응했어야 했을까? 지금이라도 둘러댈까?

결국에는 아무 일 없었다. 그 작은 소동 이후 부모님이 나에 대해 아시는 정보가 바뀌었나 몇 번 찔러보기는 했다. 혹시 퀴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장난으로 내가 남자친구를 집에 불러온다면 어떠실지, 나도 이제 ‘기초’화장은 한다는 둥…

뭐 사실 진짜로 가족한테 커밍아웃할 생각은 없다. 일단 학비랑 생활비는 필요하니깐! 나중에 내가 자립할 수 있으면 통보하는 식으로 커밍아웃 하고 싶다. 잘생긴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가서, 우리 관계에 대해 해명도 하지 않고 눈앞에서 찐한 키스를 하고 싶다. 이성애자 커플이라 해도 매우 부적절할 강도의 키스를. 그때가 되면 자기가 인정하든 말든 손해 보는 건 자기일 테니깐.

진짜로 실행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내 남친이 일반적인 기준으로 잘생기지 않을 수도, 내가 여친을 사귀고 있을 수도, 논바이너리를 사귀고 있을 수도, 심지어는 누구도 사귀고 있지 않을 수도 있으니깐. 그래도 가끔 통쾌한 망상을 하는 건 건강하지 않은가?

나 자신을 가꾸는 건 너무나도 재밌는 일이다. 내 눈가에 날개를 다는 것만으로도 신나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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