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잇다와 있다
내가 대학 첫 학기 QIS에 막 가입했을 때는 《퀴어, 플라이》 20호 ‘기록’ 편집회의가 한창 진행 중일 때였다. 그때는 아쉽게도 무시무시한 전공 과제 때문에 바빠서 《퀴어, 플라이》에 참여하지는 못했다. 내가 처음으로 《퀴어, 플라이》에 글을 쓴 것은 21호 ‘유령’ 때부터였다. 그리고 5년이 지났다. 새내기 대학생은 연구실에서 골골거리는 대학원생이 되었다. 동아리방에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밥을 먹으러 가고, 죽어라 시험공부를 하던 많은 사람들이 떠났고 또 많은 사람들이 새로 들어왔다.
유감스럽게도 이제는 정말 5년 전 《퀴어, 플라이》의 모습을 기억하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것 같다. 예전에 함께 했던 친구들은 더는 동아리에 나오지 않거나 학교를 떠났고, 지금 함께 하는 친구들은 예전의 일을 잘 모른다. 몇몇 과거는 《퀴어, 플라이》라는 기록으로 남는 데 성공했지만, 그 이면의 여러 가지 소소한 일화는 지금으로서는 나의 기억으로만 살아 있다. 남기지 않은 기억은 머지않아 쉽게 날아가 버린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이런 글을 쓰게 되다니 나 좀 짱인듯’이라는 자부심과 쓸데없는 의무감으로 가득 찬 채 자판을 두드리게 되었다.
5년씩이나 시간을 쪼개며 《퀴어, 플라이》에 실을 글을 썼지만, 나는 여전히 글을 잘 못 쓴다. 어려운 글은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냥 내가 본, 21호에서 30호까지의 《퀴어, 플라이》와 나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개인 블로그에 정리해도 될 법한 내용을 굳이 또 《퀴어, 플라이》에 남기려고 아득바득 적고 있다는 점에서, 이 글은 《퀴어, 플라이》의 유서 깊은 떡밥인 ‘자기서사’일지도 모른다(생각해보니 이 논쟁마저도 나만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기록이라는 것은 결국 기록자의 관점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완벽하게 객관적인 기록자가 아니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다만 이 글은 어디까지나 내 관점에서 쓰였다는 맥락을 기억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연쇄와 변화
| 호수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기획 | 유령 | 사랑 | 배설 | 거짓말 | 축제 | 외계 | 옷 | 죽음 | 이름 | 연결 |
| 편집 | Boulez | 뚜이부치 | 뿌수미 | 뚜이부치 | 스타더스트 | 스에 | 미리내 | |||
| 표지 | 임유진 | 김수림 | 레마 | 펠릭스 | ||||||
| 조판 | 뿌수미 | 원영 | 펭긴 | |||||||
어쩌다 보니 28호와 29호 이렇게 편집장을 두 번이나 했지만, 편집장을 맡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학기가 끝날 때마다 다음 편집장은 누가 할 것인지가 《퀴어, 플라이》를 주시하는 이들의 최대 고민거리이다. 그런데도 《퀴어, 플라이》가 어느덧 5년이 지나 30호에 이른 것은 신기하게도 매 학기 ‘편집장? 그거 재밌겠네!’라며 날아드는 불나방이 꼭 하나씩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불나방을 끌어들이는 건 주로 나중에 기획으로 선정되는 특정한 단어이다.
나는 21호 편집장 Boulez가 ‘유령’이라는 단어에 홀리는 모습을 SNS에서 실시간으로 지켜봤었다. 정확히는 ‘유령’ 기획을 하고 싶어서 편집장이 되겠다고 나선 것에 가깝지만 말이다. 물론 평범하게(?) 회의에서 브레인스토밍을 하다가 기획이 결정된 적도 있었다. 뚜이부치가 편집장을 맡은 22호 ‘사랑’은 기획이 ‘폭력’으로 거의 굳어져 갈 때 갑자기 나타나 판을 뒤엎고 기획이 되었다. 23호 ‘배설’, 24호 ‘거짓말’, 25호 ‘축제’는 무난하게 기획회의에서 소거법을 거쳐 결정된 기획이었다. 여기에서 살아남는 기획은 주로 기획회의에 참석한 편집장과 필진들이 쉽게 글감을 떠올릴 수 있는 단어, 즉 이것저것 파생되는 소재가 많거나 여기저기 끌어다 붙이기 쉬운 단어이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 기획회의와 투표를 거친다 해도 기획을 결정하는 데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편집장의 의지인 것 같다. 이를테면 26호 ‘외계’와 27호 ‘옷’은 편집장인 스타더스트가 꾼 꿈이 고스란히 기획이 된 경우이다. 사실은 나도 ‘죽음’이라는 기획이 너무 하고 싶어서, 그 기획을 가슴에 품은 채 반 학기 정도를 기다렸다. 29호 ‘이름’은 솔직히 말하자면 브레인스토밍에서 나온 여러 단어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서 내가 은근히 힘을 실었던 기획이었다. 30호 ‘연결’은 29호 기획회의 브레인스토밍에서 처음 등장했다가, 그다음 호에서 화려하게 부활하여 기획으로 낙점된 경우이다.
21호부터의 《퀴어, 플라이》 편집회의 모습도 그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해진 시각에 동아리방에 모여 편집장이 인쇄해 온 원고를 읽고 각자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는 방식 말이다. 다만 2016년을 전후로 어느 시점에서인가 동아리방의 프린터기를 치워서, 편집장이 동아리비로 충전한 CP게이트 인쇄 카드를 가지고 가서 원고를 인쇄해왔다. 21호 ‘유령’ 편집회의를 열 때는 하필 학생회관 옆 26동이 재건축을 하고 있어서 공사 소음 때문에 도저히 동아리방에서 회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문대 강의실을 빌리거나 카페에 딸린 세미나실을 쓰기 위해 단체로 커피를 시키기도 했다. 이후에는 다시 동아리방으로 돌아왔지만, 25호 ‘축제’ 때와 같이 간혹 서울대입구역에서 넓고 쾌적한 공간을 따로 빌려 그곳에 모이기도 했다.
이런 회의 방식이 바뀌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다름 아닌 코로나바이러스-19였다. 28호 편집장을 맡고 나서, 개강이 미뤄지고 모임이 금지되는 초유의 사태를 마주하게 되자 도대체 어떻게 편집회의를 해야 할지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강의와 마찬가지로 온라인 플랫폼에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디스코드(Discord)를 선택한 건 그냥 내가 강의 때 실컷 접속하는 줌(Zoom)으로 또 회의를 진행하기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원래는 디스코드에서 다른 QIS 회의도 진행하려고 QIS 전용 서버를 개설했다가 운영 회의는 그냥 줌에서 하게 되었는데, 그 서버를 그냥 놀리기가 아까워서 굳이 디스코드로 진행하겠다고 결정했다. 그런데 막상 써보니까 채팅 UI가 더 직관적으로 구성된 디스코드가 회의하기 훨씬 편했다. 회의 속기자 입장에서도, 굳이 모든 발언을 일일이 받아쓸 필요 없이 오간 채팅을 복사하기만 하면 되니 디스코드 회의가 나쁘지는 않았다. 2020년에 기껏 동아리방에 새 프린터기도 들였건만, 그렇게 28호부터 지금까지 모든 《퀴어, 플라이》 회의는 배포 때를 제외하고는 모두 비대면으로 진행되고 있다.
원래 《퀴어, 플라이》는 종강 1~2주 전에 원고 마감을 하고, 교열과 조판을 거친 뒤 종강 즈음 완성이 되고는 했다. 완성 직후에 소량을 먼저 배포하고, 그다음 학기가 시작되면 합평회를 겸하여 남은 부수를 모두 배포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원고 마감을 종강 이후로 1주, 2주 이렇게 미루면서 제작 일정이 갈수록 늦어지기 시작했다. 굳이 종강과 동시에 원고 마감을 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다음 학기가 시작하기 전까지만 완성하면 되는 거니까. 동아리방에서 회의를 할 때는 아무래도 종강 후 회의를 열기가 어려웠는데, 코로나바이러스-19로 인해 온라인 회의가 활성화되는 바람에, 종강 이후에도 회의를 소집하기가 한결 쉬워져 일정을 미뤄도 별로 부담이 없었던 것도 있다.
자금과 소통
수백 권이나 되는 책을 만들어 뽑고 학교 곳곳에 뿌리는데 돈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퀴어, 플라이》는 3호 ‘이성애’부터 학내 자치언론기금의 준회원이 되어 분배금을 받기 시작했고, 5호부터 자치언론기금 정회원으로 승격되어 현재까지도 참여하고 있다(자세한 것은 《퀴어, 플라이》 10호에 실린 〈편집장 인터뷰〉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20호 ‘기록’ 때는 약 270만 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자치언론기금에 참여하는 자치언론이 늘어난 까닭에 29호 ‘이름’ 때는 100만 원도 안 되는 금액을 받기도 하였다. 그래도 적지 않은 돈인 것은 분명하다.
내가 《퀴어, 플라이》에 글을 써오는 동안 중간에 자치언론기금과 관련된 곡절이 있었는데, 24호 ‘거짓말’ 때 자치언론기금 정회원의 자격인 글자 수 6만 자를 채우지 못해서 한 학기 준회원으로 떨어져 25호 ‘축제’ 때는 분배금을 절반만 받은 적이 있었다. 다행히 그다음부터는 다시 정회원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예산이 부족해 물량이 적어서 그런지 유독 25호 단행본은 구하기가 어렵다. 개인적으로 《퀴어, 플라이》를 1호부터 최신 호까지 꾸준히 모아온 나도 25호 ‘축제’는 구하지 못했다. 《퀴어, 플라이》 편집장이 글을 쓸 필진을 애타게 구하는 데는 이런 대단히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여담으로 28호 ‘죽음’은 11만 5천 자 정도가 나왔고, 29호 ‘이름’은 10만 자가 나왔다. 이번 30호도 글자 수가 부족하지는 않을 것 같다.
현재 자치언론기금에 참여하는 학내 자치언론은 《퀴어, 플라이》 말고도 《교육저널》, 《서울대저널》, 《The SNU Quill》, 《Thisable》이 있고, 얼마 전에 《PEEP》이 자치언론기금에서 빠졌다고 한다. 자치언론기금 회의는 한 학기에 2번 열린다. 1차 회의에서 기금의 절반을 모든 언론이 똑같이 나눈 다음에, 2차 회의에서 나머지 절반을 관습적으로 광고 수입이 없는 《퀴어, 플라이》, 《Thisable》, 《교육저널》 위주로 나눈다. 다른 자치언론 사람들과 만날 기회는 그 두 번이 끝이다. 그마저도 예산안과 결산안을 검토하고, 최신 호의 글자 수가 6만 자가 되는지 확인하고, 돈을 나누고 나면 각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흩어진다.
2020년 3월에 《서울대저널》에서 160호 특집 기사 〈성소수자 N인 N색〉을 쓰기 위해 QIS에 인터뷰를 요청한 적은 있었지만, 20호 ‘기록’ 이후로 다른 자치언론과의 소통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 점이 못내 아쉽기도 하지만, 사실 어찌 보면 귀찮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일이다. 자치언론기금 위원장은 자치언론기금에 참여하는 각 자치언론의 대표가 매 학기 돌아가면서 맡는데, 다음 학기 자치언론기금 위원장은 《퀴어, 플라이》에서 맡을 차례라고 한다. 아무쪼록 31호 편집장이 자치언론기금 위원장의 역할을 잘 해내길 바랄 뿐이다.
필진과 독자
편집장이 《퀴어, 플라이》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공을 들이는 부분은 아마 필진 모집일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다음 학기 자치언론기금을 받기 위한 최소 분량을 채워야 하는 것도 있지만, 편집장이라면 누구라도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내고픈 욕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 동아리라는 특성상 QIS의 인원이 영원히 똑같지 않은 것처럼, 《퀴어, 플라이》의 필진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뀌어 간다. 그 과정에서 《퀴어, 플라이》의 독자가 새롭게 필진으로 합류하기도 한다.
5년이라는 시간은 짧다면 짧다고도 할 수 있지만, 《퀴어, 플라이》의 필진이 완전히 교체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쩌다 보니 21호부터 30호까지 계속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은 이제 나밖에 남지 않았다(사실 이쯤 되면 내가 눈치 없이 안 나가고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5년 동안 꾸준히 《퀴어, 플라이》와 함께 한 나의 경험을 돌이켜보았을 때, 그동안 《퀴어, 플라이》의 회의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21호 ‘유령’ 때만 해도 지금에 비하면 날카롭고 거침없는 비평이 오가는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물론 그만큼 무수한 담금질을 거쳐 깊이 있는 글이 나올 수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때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일화를 하나 들자면, 21호 ‘유령’에 실린 솥빵의 〈부끄러움〉과 〈부끄러움, 추기〉를 보면 글의 논조에 반발한 Boulez가 “화를 냈다”라는 서술이 있다. 그렇지만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단순히 화만 낸 정도가 아니었다. 그날 회의는 강의실을 빌려서 원고를 읽으며 의견을 주고받다가, 그만 토론이 과열되어 Boulez는 흥분하고 다른 이들도 어느새 죄다 자리에서 일어나 목소리를 높이는 그런 아수라장이었다. 그 광경이 참 당황스러웠는지, 내 머릿속에는 그 회의가 아직도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그 시절 회의에서 나의 역할은 늘 “헉! 이 글 이 장면이 너무 좋아요! 저 부분 정말 공감해요!” 이렇게 좋은 말만 하는 것이었다. 사실 진짜로 좋은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회의 때 보는 다른 필진의 글은 모두 내가 상상하지도 못할 기발한 아이디어가 넘쳐흘렀고, 글이 너무 재밌어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막상 내가 편집장이 되고 나니까, “음, 이 글은 뒷부분이 부족해서 글이 아직 다 안 끝났다고 느껴져요. 이렇게 보충해오면 좋을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 팔짱 끼고 단호한 의견을 내놓게 되었다. 솔직히 내가 아니면 그런 말을 해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21, 22, 23호의 필진에 비하면 그래도 비평을 최대한 부드럽게 돌려 말했다고 생각한다.
5년 사이 필진 구성이 가장 많이 바뀌었을 때는 아마 25호 ‘축제’에서 26호 ‘외계’로 넘어가는 시점일 것이다. 25호까지 꾸준히 글을 써오던 필진 다수가 나, 스타더스트, MULE을 제외하면 26호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일종의 세대교체가 일어난 셈이다. 아마 새 필진 중에는 기존에 《퀴어, 플라이》 독자였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필진 중에서 시스게이가 차지하는 비율도 많이 줄어들었다. 대신에 폴리아모리, 에이로맨틱, 논바이너리 등 이전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정체성의 이야기가 그 자리를 채웠다. 나는 그동안 QIS의 회원 구성 자체가 변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에브리타임 게시판에서 아직도 QIS를 두고 “끼순이 동아리” 운운하는 것을 보면 웃음만 나온다. 그 끼순이 우리도 한 번 만나 보고 싶다.)
필진이라고 보기는 애매하지만, 필진만큼이나 중요한 사람이 《퀴어, 플라이》 디자인 담당이다. 표지 디자인과 내지 디자인 담당에게 각각 소정의 수고비를 드리고는 있지만, 외주를 맡길 만큼 사정이 넉넉하지는 않은 탓에 QIS 회원에게 맡기거나 지인을 소개받기도 한다. 디자이너 임유진 씨는 22호까지의 표지를 담당해주셨다. 23호부터 25호까지는 김수림 씨가, 26호는 레마, 27호부터는 펠릭스가 《퀴어, 플라이》의 첫인상인 표지를 맡았다. 한편 내지 디자인은 25호까지는 뿌수미가, 26·27호는 편집장의 지인인 원영 씨가, 28호부터는 펭긴이 담당하였다.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이 있다면, 27호 ‘옷’부터 《퀴어, 플라이》 마지막에 들어가는 〈필진 후기〉에 〈디자이너의 말〉이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퀴어, 플라이》는 총학생회 산하 자치언론기금의 정회원이기 때문에, QIS 회원뿐만 아니라 서울대의 학우라면 누구든지 《퀴어, 플라이》에 투고할 수 있다. 이 외에도 QIS 회원의 소개로 외부 필진의 글이 종종 실리기도 하였다. 21호부터 지금까지 외부 필진이 투고한 글은 23호 ‘배설’에 실린 단짠단짠의 〈로맨틱 토일렛〉, 25호 ‘축제’에 실린 원숭이집의 〈새 텍스트 문서〉와 오레오의 〈벅찬 퀴어의 삶〉에 첨부된 섬멍 작가의 만화, 28호 ‘죽음’에 실린 인절미의 만화 〈죽음의 부가서비스〉, 30호 ‘연결’에 실린 서랍의 〈가족〉이 있다. 인절미는 스위치라는 이름으로 29호 ‘이름’ 단행본의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퀴어, 플라이》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인 독자가 있다. 《퀴어, 플라이》의 〈필진 후기〉 뒤에는 항상 QIS 가입 안내와 함께 《퀴어, 플라이》 후원 안내가 들어간다. 실제로 매 학기 약 2~3통의 후원 문의 메일이 날아온다. 편집장으로서 《퀴어, 플라이》 후원을 문의하는 메일이 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후원 금액이 많지 않더라도, 일단 열심히 읽어주시고 또 후원하시겠다고 메일까지 써서 보내오신다는 점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퀴어, 플라이》라는 매체를 통해 우리는 QIS 회원뿐만 아니라 동아리 너머의 독자들과도 소통해나간다.
배포와 보존
이렇게 여러 사람의 손길을 거쳐 완성된 《퀴어, 플라이》는 동아리방에 따로 빼놓은 십여 권을 빼놓고는 남김없이 캠퍼스 곳곳에 뿌려진다. 학생회관 1층부터 시작해서, 중도터널, 기숙사, 인문대 신양, 사회대 16동, 자연대 25동과 500동, 사범대 12동, 경영대 58동, 법대 15동, 아랫공대, 83동, 여유가 되면 윗공대와 연건캠퍼스까지. 매 학기 《퀴어, 플라이》가 나올 때마다 배포할 장소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코로나바이러스-19로 인해 단과대 출입이 어려워져서 배포할 곳이 확 줄어버린 점은 애석하지만, 자치언론기금의 분배금이 줄어듦에 따라 뽑을 수 있는 부수도 적어지는 바람에 학관과 중도같이 중요한 곳에 배포되는 《퀴어, 플라이》의 부수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매 학기 초 《퀴어, 플라이》를 배포하는 날에는 동방이 북적인다. 드넓은 캠퍼스 곳곳에 수백 권을 배포하려면 최대한 많은 인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커밍아웃한 과 선배는 《퀴어, 플라이》가 새벽 3시 같은 아무도 없는 시간에 배포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퀴어, 플라이》 배포는 보통 배포할 사람을 가장 많이 모을 수 있는 저녁 7~8시쯤에 진행된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오히려 학생회관 1층에 《퀴어, 플라이》를 쌓으면 “이거 가져가도 돼요?”라고 하면서 배포되자마자 잽싸게 가져가는 사람은 본 적 있었다.
《퀴어, 플라이》는 학교 곳곳에 배포되는 단행본뿐만 아니라 네이버 블로그(https://blog.naver.com/queer_fly)로도 만나볼 수 있다. 물론 내지 디자인 담당자가 정성스럽게 조판한 단행본을 읽는 재미도 있지만, 블로그는 언제 어디서나 《퀴어, 플라이》의 내용을 쉽게 찾아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나에게도 《퀴어, 플라이》 단행본은 일종의 소장판이라는 느낌이 있다. 또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동아리방에 《퀴어, 플라이》 단행본이 단 한 권도 남지 않더라도, 블로그에 접속하면 최소한 그 내용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퀴어, 플라이》 블로그는 《퀴어, 플라이》의 접근성(accessibility)을 높이는 동시에 일종의 자체 아카이브(archives) 역할도 하는 셈이다.
《퀴어, 플라이》는 현재 2곳의 외부 아카이브에도 따로 보존되어 있다. 하나는 서울대학교 기록관으로, QIS에서 2019년 초에 《퀴어, 플라이》를 1호 ‘시선’부터 24호 ‘거짓말’까지 기증하였다. 다른 하나는 퀴어락(한국퀴어아카이브)로, 이전에도 QIS에서 몇 차례 《퀴어, 플라이》를 기증해온 것 같다. 최근에는 솥빵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내가 2020년 9월에 직접 19호 ‘일반’과 21호 ‘유령’부터 28호 ‘죽음’까지 당시 퀴어락에서 보관하고 있지 않은 《퀴어, 플라이》 나머지 호를 모두 보냈었다. 매번 《퀴어, 플라이》가 나올 때마다 동아리방에 보존과 열람을 위해 20부 정도 남겨놓도록 하고 있지만, 미래를 생각해서 앞으로 편집장들이 외부 아카이브에도 신경을 써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제와 내일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퀴어, 플라이》를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처음에는 그냥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을, 하지만 언젠가는 어디든 털어놓고 싶어 안달이 났던 이야기들. 아마 《퀴어, 플라이》에 글을 쓴 다른 사람도 나와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퀴어, 플라이》에 글을 꾸준히 쓰면서 상당한 성취감을 느꼈고, 여기에 중독되기에 이르렀다. 동아리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학교를 떠나고, 그들의 존재감은 점점 희미해져 가는 기억과 서서히 끊어져 가는 관계로 옅게 남아 있다가 점차 사라진다. 《퀴어, 플라이》를 통해 나는 내가 여기 있었다는 것을 보다 선명하게 남기고 싶었다. 어찌 보면 《퀴어, 플라이》에 글을 쓴다는 것은 꽤 바람직하면서도 오히려 권장되는 자의식 표출 방식이다.
언젠가 다른 학교 사람들이 《퀴어, 플라이》를 보며 느꼈던 점을 간접적으로 들어볼 기회가 있었다. 일단 《퀴어, 플라이》에는 어려운 글이 올라온다고 한다. 매우 맞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무래도 25호 ‘축제’에 마지막 글을 남겼던 사람이 그런 인상을 남기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그리고 다른 학교의 성소수자 동아리가 내는 문집과 달리 《퀴어, 플라이》는 용케도 폐간되지 않고 지금까지 꽤 오랫동안 계속 나오고 있다. 왜 그런지 알아보려면 왠지 논문이라도 한 편 써야 할 것 같으니, 훗날을 기약하도록 한다.
어쨌든 우리는 학기마다 꾸준히 쌓인 《퀴어, 플라이》를 보며 과거의 특정 시점, 그 당시의 누군가와 맞닿을 수 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일련의 기록에서 어떠한 연속성을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꼭 거창한 무언가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Boulez는 당시 완공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14동에서 21호 기획의도를 썼고, 나는 지금 5년이 지난 후 14동에 앉아 30호에 싣는 이 글을 마무리 짓고 있다. 나 개인은 《퀴어, 플라이》 지난 호를 보며 내가 처음 동아리에 가입했을 때 만나 친해졌던, 지금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떠나버린 옛 친구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이제 더는 동아리방에 나타나지 않지만, 그들의 자취는 《퀴어, 플라이》에 남아 있다.
《퀴어, 플라이》는 2006년부터 지금까지 15년에 걸쳐 이어졌다. 생각해보면 기적만 같다. 25호 ‘축제’는 이미 편집장을 두 번이나 했던 뚜이부치가 돌아와 간신히 살려내어 이어진 결과물이다. 《퀴어, 플라이》가 이렇게 어느덧 30호까지 내게 된 것은 그동안 《퀴어, 플라이》에 열정과 사랑과 관심을 아낌없이 보내온 수많은 편집장, 필진, 디자이너, 후원자, 독자가 있기 때문이다. 《퀴어, 플라이》는 어쩌면 서로 마주칠 일도 없을 다른 시간대의 사람들도 《퀴어, 플라이》라는 이름 아래 통시적으로 잇고 묶어낸다.
이제 《퀴어, 플라이》는 호수 앞자리가 2에서 3으로 넘어간다. 30번대 호에는 또 새로운 기획, 새로운 사람, 새로운 흐름이 나타날 것이다. 언젠가 나도 친구들도 학교를 떠나고 나면, 마치 테세우스의 배처럼 《퀴어, 플라이》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의 《퀴어, 플라이》는 《퀴어, 플라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과 이어질 수 있다. 나는 앞으로 《퀴어, 플라이》가 갈 길을 즐겁게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10호 편집장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듯이 훗날 35호, 40호에 초창기 《퀴어, 플라이》를 만들고 유지해왔던 선배들의 축사가 실리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