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의 말: 이름을 불러보아요, 주문을 외워보아요
사람들은 예로부터 이름에 강한 힘이 있다고 믿은 모양이다. 이를테면 부모나 군주의 이름은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되는 피휘(避諱)의 대상이었다. 한편 신을 믿는 이들은 자신이 믿는 신의 이름을 끊임없이 부르짖는 것으로 신의 권능을 불러오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하였다. 또한 자신을 감추려는 이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이름을 꾸며내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이름의 힘에 대한 믿음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누군가의 특징을 담으려는 듯한 별명에서 발견할 수 있다. 부르기만 하면 상대를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진명’은 판타지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퀴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했는지 생각해보자. 그 시작은 다수와는 어딘가 다른 이들에 대한 경멸의 의미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전유하여 우리의 이름표로 삼았다. 여집합에 불과했던 우리는 그렇게 퀴어라는 이름으로 묶였다. 이는 태어났을 때 우리에게 쥐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찾아 스스로 고른 것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이 이름이 우리를 얽매는 굴레가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름은 우리를 구분 짓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름은 일종의 주문일지도 모른다. 평범한 말이 아닌 주문에는 으레 힘이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공기를 가르고 세계를 변화시킨다. 주로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이 반응하는 식으로 말이다. 한편 이름은 현재가 아닌 시점의 무언가를 불러내는 힘도 가지고 있다.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은 시간을 넘어 이름이 존재하는 그 순간에 소환되어 놓인다. 이름이 불러낸 심상은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의 대화 속에서 곱씹어지고 파헤쳐진다.
그렇다면 퀴어들은 지금 무엇을 부르고자 하는가? 지나간 시간의 단편이다. 그동안 돌아보지 못했던 깊숙한 내면이다. 쓰라렸지만 행복했던 사랑의 기억이다. 모든 것을 바쳐 왔던 열정의 흔적이다. 간절하고 치열했던 성찰의 결과이다. 각자 이름 속에 간직하고자 했던 수많은 생각이다.
우리는 이름 짓는 순간, 무엇이든 부를 수 있다.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고, 온갖 재료를 뒤섞어서 뿌리고, 제물을 바치는 복잡한 의식 없이도 무언가를 소환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한 주문이 바로 이름이다. 그것이 우리가 일컬을 수 없는 무언가에 어떻게든 이름을 붙이려고 노력하는 까닭일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부르고자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