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의 말: Memento Mori

모든 사람은 죽는다.
우리는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죽는다.

논리학 교재 어딘가에 삼단논법의 예시로 나올 법한 말입니다. 하지만 곱씹어보면 참으로 무거운 진실입니다. 필멸자들은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할 수 없고, 언젠가는 숨이 끊어져 세월의 흐름에 잊히겠죠. 때로는 야속하겠지만, 저와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모두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은 ‘죽음’이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아마 어떤 분들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아주 머나먼 미래의 일처럼 낯설게 느껴질 겁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삶의 곳곳에서 죽음과 마주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장례식을 다녀오게 된다든가, 나 혹은 가까운 누군가가 사고를 당했다든가 등등. 그러면 문득 우리가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사실 죽음이 우리에게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오는 데는 순서가 있지만, 가는 데는 순서가 없다’는 유명한 말처럼, 우리는 우리가 언제 죽을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당장 내일의 미래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가깝게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부터, 멀게는 아직 아득하기만 한 것 같은 나의 죽음까지, 죽음이 지닌 여러 얼굴만큼이나 우리가 죽음을 대하고 그려내는 방식 또한 매우 다양합니다. 애도를 끝낸 뒤 감정을 정리하고 일상을 회복하기까지에는 각자 너무나도 다른 길이의 시간이 필요하고, 저마다 다른 방법이 쓰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만의 죽음에 대한 관념을 차곡차곡 쌓아 갑니다. 한편 단호하고 냉정한 마음으로 작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법과 제도가 보장하지 못하는 좋은 죽음을 위해, 그리고 앞으로 남겨질 문제를 미리 처리하기 위해 맑은 정신으로 죽음의 공포와 마주하기도 합니다.

인간이라면 그 어떤 누구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제아무리 천하를 호령하는 최고 권력자라도,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재벌이라도 언젠가는 모든 것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이제껏 어떻게든 죽지 않으려는 수많은 군주들의 무의미한 시도는 늘 거대하고 화려한 무덤만 남긴 채 실패로 돌아갔지요. 이렇게 보면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해 보입니다. 하지만 과연 정말로 그럴까요?

퀴어들의 자살률이 유달리 높다는 여러 통계, 그리고 자조적으로 읊조리는 ‘성 소수자 평균수명은 40년’을 떠올려 봅니다. 아픈 기억을 더듬어 혐오로 인해 우리 곁을 떠나버린 수많은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되뇌어 봅니다.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왔지만, 죽음의 문턱에 선 반려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이들을 기억해 봅니다. 어쩔 수 없이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키며,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 봅니다. 죽음은 사실 공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곱씹어 봅니다.

어니스트 베커는 <죽음의 부정>에서 죽음과 섹스는 쌍둥이라고 말합니다. 둘 다 사람들이 좀처럼 입에 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섭도록 닮았습니다. 문득 우리의 존재가 죽음 그 자체와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섹스라는 말만 꺼내도 기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마치 건전한 성 관념에 종말을 가져올 무시무시한 저승사자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막상 우리도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말이지요.

우리를 저승사자로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이번 호의 이야기는 썩 유쾌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대부분 어둡고 쓰라린 일입니다.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때로는 비릿하고 역겨운 날것의 정념을 마주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말하고 싶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획은 ‘죽음’이지만, 사실 이번 호는 살아있는, 살아가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투쟁기일지도 모릅니다. 상실의 고통을 이겨내고, 언젠가 닥쳐올 세상과의 영원한 작별을 준비하는 산 자들의 삶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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