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가벼움

스에
January 1, 0001

1/

전공 덕분에 발달심리학을 아주 살짝 맛보기로나마 배울 기회가 있었다. 보통 아동이 지닌 죽음에 대한 관념은 12세 이후, 피아제의 인지 발달 이론에 따르면 형식적 조작기에 이르러서야 성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완성이 된다고 한다. 그 시기쯤이 되면 추상적인 사고가 발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인 것 같다. 예를 들어 나에게 9살 때의 친할머니 장례식과 15살 때의 외할아버지 장례식은 사뭇 다른 기억으로 남아 있다.

사실 친할머니 장례식 때의 기억은 이제 흐릿하다. 다만 몇몇 장면만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입원해 계신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뵌 뒤 귀경하는 길이었다. 고속도로에 막 진입했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어린 자식들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가장 가까운 휴게소에 급히 차를 댄 채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 나에게는 난생처음 보는 아버지의 약한 모습이었다. 그다음은 드문드문 어떠한 감각의 파편이 이리저리 뒤섞일 뿐이다. 어머니가 급히 담임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찾던 회색 수첩, 삼베옷을 입은 친가 식구들, 어느 절에서 정신없이 보낸 49재, 아버지가 할머니를 추억하기 위해 자주 틀었던 유키 구라모토 음악 등등.

중학교 2학년쯤이 되어서야 나는 비로소 사람의 죽음이란 무엇인지 제대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갑작스럽게 맞았다. 그 지난주만 해도 병문안을 왔다가 돌아가는 부모님 배웅까지 나가셨던 분이었다. 한 달 전만 해도 나에게 전화를 걸어 컴퓨터 사용법을 묻던 할아버지가 더는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 당장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정말 슬펐다. 입관식 때도, 관이 화장로로 들어가는 순간에도 나는 다른 식구들과 함께 엉엉 울었다. 특히 모니터를 통해 관이 화장로로 들어가고, 화장로 문이 닫히는 그 장면을 보는 그 비감(悲感)함은, 도저히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할아버지를 떠나보내서 참 슬펐다는 점을 빼고는, 사실 그럭저럭 차분한 장례식이었다. 뭐, 장례식이라는 건 대부분 원래 슬픈 법이니까. 아무도 싸우지 않았고, 제법 많은 화환이 빈소 앞에 놓였으며, 그보다 더 많은 조문객이 찾아왔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분들은 한국전쟁 참전용사였던 할아버지의 전우들이었다. 하얀 참전용사 모자를 쓴 할아버지들이 별 말 없이 차례차례 들어오셔서 조문하고 식사하시는 모습은 엄숙함을 넘어 어떤 굳은 결의마저 느껴졌다. 지금도 동료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 장례식을 간다는 건 대체 어떤 느낌일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들을 맞아 정신없는 와중에 그래도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중환자실에서 별로 긴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는 점을 떠올리며 애써 감사해했다.

그렇지만 3일장 일정을 견뎌내는 것 자체가 중학생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도 나름대로는 가족을 떠나보냈다는 슬픔과 태어나서 처음 제대로 느끼는 상실의 아픔에 잠긴 채로 말이다. 항상 불이 켜져 있고, 에어컨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장례식장 안에서는 도무지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대충 밤이 된 것 같으면 빈소 옆에 있는 몇 평도 안 되는 아주 조그만 방으로 들어가 8명이나 되는 식구가 이리저리 낑겨 불편한 잠을 청했다. 나는 조문객이 없어 한가한 시간에는 혼자 장례식장 로비로 나가고는 했다. 그러고는 아무 의자에 털썩 앉아서는, 아, 장례식이라는 게 꼭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참 힘든 행사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장례식이 끝난 뒤에도 우리 식구가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제대로 정리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어느 쪽이든 말이다. 의외로 외할머니는 장례식 내내 의연했다. 아니, 그렇게 보였었다. 그 후 몇 달이 지나서 갑자기 어머니한테 외할아버지가 너무나도 보고 싶다는 전화를 걸었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우리 가족은 아주 서서히, 천천히 슬픔에서 벗어났고, 외갓집에 갈 때마다 기차역으로 마중 나오시는 할아버지 대신 방 한 켠에 걸려 있는 영정사진을 마주하는데도 익숙해져 갔다.

외할아버지의 흔적이 남아 있는 물건을 정리하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시급했던 것은 바로 돈과 관련된 문제였다. 장례식이 끝나고 우리 가족은 방에 모여 수많은 조의금 봉투를 열어 금액을 확인했고, 나는 그 목록을 엑셀로 정리했다. 한편 할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셔서 남기고 간 빚이 있었다. 그 빚 때문에 상속 포기 절차를 밟는 게 보통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일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은 그걸 처리하느라 심지어 몇 년 전까지도 여러 은행과 기관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어느덧 10년 전의 일인데도. 이렇게 내가 겪은 누군가의 죽음은 유족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분명한 현실이기도 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뉴스에서 교통사고라도 나서 사망 ○명, 부상 ○명 이런 제목을 보면 심장이 철렁했다. 아, 어디선가는 또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식구가 겪어내었던 그 슬픔을, 망각의 시간을, 지독한 현실을 갑작스럽게 버티게 되었구나. 한 사람과 연을 맺은 많고 많은 사람들이 식장을 오가며 또 많은 생각에 젖겠구나. 그 숫자 한 명 한 명마다 각각 여러 가지 일을 겪을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든 일단 사망자가 없다는 소식을 접하면 진심으로 감사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고3이었을 때 일어났던 세월호 사건은 나에게 매우 큰 충격이었다. 사건과 관련된 지역에 살거나,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한 사람의 죽음이 갖는 무게를 실감해버린 나는 그 숫자를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었다. 매일 뉴스를 확인하면서, 또래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절망하고 슬퍼했다. 점심을 먹고 학교 주변을 빙빙 돌며 산책을 하면서도, 계속 슬픔과 죄책감에서 쉬이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살아서 마른 땅을 따뜻하고 건조한 몸으로 딛고 서 있다는 것 자체가 마치 커다란 죄를 짓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몇 년 전에는 먼 친척 어른이 돌아가셔서 부모님이 장례식 참석차 서울에 올라온 적이 있었다. 돌아가신 분은 나와는 먼 사이고 한 번도 뵌 적이 없어서 굳이 갈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냥 서울에 온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는 장례식장으로 갔었다. 생전 처음 뵙는 여러 친척과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뒤 나는 장례식장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때 부모님이 동생의 반 친구가 학교 앞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동생의 수능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나에게는 얼굴도 모르는 친척 어른보다는 그 친구의 죽음이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부모님과 헤어지고 나서 그날 밤에 예정되어 있던 큐이즈 신입 모임에 갔었다. 시끌벅적한 술집에 앉아 있으면서도, 누구에게도 집중할 수가 없었고, 도저히 뭔가를 먹고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양해를 구하고 그 자리에서 일찍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역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의 죽음이지만, 뭔가 허한 마음에 술을 못 먹는 나는 홧김에 탄산 주스를 사서 집에 들어가 병나발을 불었더란다. 동생의 졸업식 날, 복도에서 창문을 통해 교실을 들여다보던 나는 결국 잘 알지도 못하는 후배 이야기가 나오자 반 아이들과 함께 얼굴이 빨개지도록 울어버렸다.

죽음의 무게를 논하기에는, 사실 나는 아직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내 친구들은 모두 제각기 잘 지내고 있고 우리 가족은 건강하고 화목하다. 그렇지만 친척과 모르는 이의 죽음을 겪은 것만 해도 내 삶은 뿌리째 흔들렸다. 아마 내가 다른 사람의 감정에 쉽게 공감하고 휩쓸리는 성격인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만약 당장 내 친한 친구나 가족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 나는 어떻게 될지 상상만 해도 너무 무섭다. 나에게 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것은 엄청나게 무거운 것이고, 이제 나는 그것을 알기 이전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2/

살면서 처음으로 자살 충동을 느꼈던 때는 아마도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당시 갑작스러운 이사로 전학을 가게 된 나는 새로운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고, 예전 학교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때 내 방 창문 바깥으로는 정수장의 너른 풀밭이 보였다. 우리 집은 9층이었고,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면서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다행히도 여태까지 나는 충동을 행동으로 옮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그때도 어찌어찌 그 순간을 넘겨서 새로운 학교에도 그럭저럭 적응했었다.

어쩌면 이것이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학교생활을 불행하게 만든 문제 중 8할 이상은 인간관계 때문이었다. 나는 또래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매년 나와 친한 친구는 많아야 두세 명이었고 어떤 해는 한 명도 없었던 적도 있었다. 또래들은 나에게 너무나도 낯설고 이질적인 족속이었다. 시끄럽고 뒷말하는 것을 좋아하며 아이돌 혹은 이성 교제에 진심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어울리지 못해 불행했다. 지금은 주말에 아무런 약속 없이 혼자 집에서 누워 지내는 것이 가장 행복한 나라고 해도, 아무래도 청소년일 때는 친구들이 최고인 것만 같고, 좋아하지 않는 애들이라도 또래의 시선이, 그 무언의 압력이 엄청나게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중고등학교 6년 내내 학교 가는 것이 즐겁거나 심지어 괜찮았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고등학생이 되자 매일 10시까지 강제로 야자를 하며 입시 스트레스까지 더해졌다. 학교에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나를 싫어하는 애들만 있었고, 나는 안 그래도 어려운 공부를 하며 그 애들과 온종일 함께 지내야만 했다. 게네들과 있는 것 자체가 나에겐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다. 그때는 너무 지쳐 있어서 행동은커녕 죽고 싶다는 생각도 그렇게 자주 안 들었던 것 같다. 어쩌다 간혹 드는 그 죽고 싶다는 생각조차도 굉장히 수동적이었다. 이대로 잠이 들어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같은 식으로.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꽃동네로 2박 3일 동안 체험활동을 갔었다. 둘째 날에는 봉사활동뿐만 아니라 꽃동네에서 하는 여러 가지 체험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재활용품 난타, 간단한 수화 배우기, 팔찌 만들기 같은 거 말이다. 원하는 프로그램이 있는 아이들은 재깍재깍 손을 들어 선착순으로 재밌어 보이는 프로그램에 배정되었다. 눈치 게임에서 밀려났거나 별생각이 없는 아이들을 위해 가장 인원수가 많이 할애되어 있던 프로그램은 다름 아닌 죽음 체험 프로그램이었다. 유언장을 써 보고, 그 유언장을 가슴에 품은 채 관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었다. 죽음 체험 프로그램에 배정된 대부분의 친구들은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나는 어쩐지 기대감에 차 있었다. 이런 것을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지만, 그때서야 처음 체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죽음 체험 프로그램에 배정된 학생들은 아주 어두운 방으로 안내받았다. 아주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는 방 곳곳에는 촛불 하나와 그 주변을 둥그렇게 둘러싼 방석들이 있었다. 우리는 각자 방석에 앉아 희미한 촛불에 의지하여 잘 보이지도 않는 종이에 유언장을 썼다. 유언장에 무슨 내용을 썼는지는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아마 가진 것도 별로 없는 고등학생 때니까, 부모님과 동생 그리고 몇 안 되는 친구들에게 그동안 고마웠고 사랑한다는 말이나 썼을 것이다.

우리는 각자 쓴 유언장을 들고 줄을 서 있다가, 차례대로 5명씩 각자 관에 들어가 유언장을 가슴에 품은 채 누웠다. 나보다 조금 앞에 서 있었던 내 친구는 관에 들어갈 순간이 되자 아무래도 버거웠는지 들어가지 않고 물러났다. 내 차례가 되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서 유언장을 가슴 위에 올리고 누웠다. 관 뚜껑이 닫히고,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사람(나중에 알고 보니 담임 선생님들이었다)이 쾅! 쾅! 하고 관 뚜껑을 내리쳐 마치 못질하는 것 같은 소리만 냈다. 그리고 침묵이 찾아왔다.

관 속은 어둡고 고요했다. 관에 들어갈 순서를 기다리고 있을 때까지는 살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무섭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하고 편안하기까지 했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도 어쩐지 바로 위에 있는 관 뚜껑의 존재가 느껴져 조금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냥 가만히 누워 있으면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뒤에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관 속에 누워 있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관 밖으로 나와서는 엉망진창으로 쓴 유언장을 버리고 갈 수 있다는 것이 홀가분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그 후로 누가 죽음 체험 프로그램이 어땠냐고 물었냐면, 그냥 생각보다 안 무서웠고 별거 없었다고 말하고는 했다. 내가 관 속에서 느꼈던 것이 심상치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성인이 되고 나서였다. 아무리 그동안 친구 문제와 입시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해도, 고작 18살이 (체험으로나마) 죽어서 관 속에 누워 있는 것이 더 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니, 도대체 얼마나 그 때 사는 데 지쳐 있었으면 그랬을까……. 심지어 꽃동네 체험활동을 갔을 때가 내 고등학교 3년 중에서 그나마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문득 고등학생 때의 내가 너무나도 가엾어지는 것이었다.

그때는 친구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는 내가 잘못된 인간인 줄로만 알았다. 여느 아이들과는 달랐던 내가 어딘가 하자가 있는 인간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쓸모없는 문제 덩어리인 나 하나만 죽으면 그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고 생각했었다. 겸사겸사 내가 살면서 겪고 있는 괴로움도 모조리 끝낼 수 있었으니까. 내가 죽으면 내 책상 위에 하얀 국화꽃이 놓이고 잠시 다들 충격에 잠기겠지만, 아무도 그다지 슬퍼하지 않을 거고 어쨌든 세상은 내가 없어도 계속 돌아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보잘것없는 존재이고, 내가 죽는다고 해도 누구에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학교를 떠난 뒤에도 계속해서 나를 좀먹어갔다. 고향을 떠나 대학교에 와서 친구 문제가 모두 사라진 후에도 나는 끊임없이 나를 괴롭힐 핑계를 만들어냈다. 서울대학교에는 너무나도 대단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에 비하면 나라는 인간은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나 빼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전공 강의에서 대답을 제대로 못 한 날에는 수업이 끝난 후 오전 11시의 햇빛 아래에서 옥상으로 올라가 떨어져 죽을까 고민하고는 했다.

금전적인 부채감도 내가 죽고 싶은 이유 중 하나였다. 비싼 등록금과 주거비 및 생활비를 아무 일도 할 필요 없이 모두 부모로부터 지원받는다는 것이 내 죄책감의 주요 원천이었다. 아버지가 나에게 폭언을 했던 것처럼 내가 정말 돈만 먹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식충이처럼 느껴졌다. 어떤 날에는 부채감과 죄책감에 반쯤 미쳐 내가 죽으면 1년에 대략 얼마가 절약될지 계산해서 내 시신 뒤처리 및 장례식 비용과 대조해본 적도 있었다.

남들은 모두 잘나고 가치 있고 무거운 목숨인 것에 비해, 여러모로 나는 죽어도 별 상관없는 존재이고, 내 목숨은 깃털보다도, 공기보다도, 가볍디가벼운 것만 같았다.

3/

어느 날, 문득 나는 1과 2에서 각각 언급한 죽음에 관한 생각이 일관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전까지는 이런 모순을 전혀 인식조차 못 하고 있었던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상했다. 모두가 평등하다면 기본적으로 목숨의 무게도 같을 터인데, 다른 누군가의 죽음은 나에게 너무나도 쓰라리고 무거운 것인데 비해 내 죽음은 한없이 하찮고 가볍게만 느껴졌다. 늘 그랬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게 되었지만, 어디서부터 생각이 일그러지기 시작한 건지 도저히 가늠조차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또 돌이켜보니 그렇게 내 목숨이 가볍다 여기는 와중에도 나는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무진장 애를 써왔었다. 나는 지금까지 대학생활문화원에서 상담을 총 3번 받았다. 처음 상담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대학교 첫 여름방학 때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준비하면서였다. 야심차게 문제집을 사서 풀기 시작했건만, 도저히 첫 장도 넘길 수가 없었다. 자꾸만 수많은 교통사고 뉴스가 머릿속에 떠다녔다. 내가 아무리 조심조심 잘 다녀도 한순간 어느 미친놈이 잘못 달려들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 고의가 아닌 사소한 실수로 인해 무고한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운전대를 잡을 수나 있을지 너무나도 불안해졌다. 더는 문제집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생전 처음으로 용기를 내서 상담을 등록했다. 일단 다른 사람을 괴롭힌다는 죄책감 없이 내가 안고 있는 괴로움을 다 말할 곳이 생겼다는 점에서 상담은 매번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궁극적인 불안은 상담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우여곡절 끝에 정신과도 2년 반 동안 다녔다. 부모 몰래 다니는 거라 비보험으로 하니 진료비와 약값을 합쳐서 한 달에 대략 5만 원 정도 나왔다. 매일같이 무능력하고 돈만 낭비하는 나는 죽어도 된다고 생각하던 와중에도 나는 별생각 없이 병원비와 약값을 냈고, 약은 빼먹지 않고 매일 꼬박꼬박 먹었다. 덕분에 완치 판정을 받고, 적어도 매일 뜬금없이 드는 자살 충동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불안장애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풍부한 상상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예전부터 학교에 갑자기 테러리스트들이 나타나 학생들을 인질로 잡는다든가, 아니면 건물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지진이 발생해서 모두 가방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건물 밖으로 대피한다든가 등 그런 비현실적인 상황을 곧잘 상상하고는 했다. 그리고 괜히 화재, 표류, 자연재해로 인한 고립, 핵전쟁 등 각종 재난 상황이 닥쳤을 때의 대처법을 찾아 심심풀이로 읽고는 했다. 그러다가 올봄에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줄곧 망상으로만 하던 생존주의를 드디어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생존배낭을 직접 꾸린 것이다.

나만의 생존배낭을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인터넷을 뒤적거리며 적당한 배낭에다가 3일 치의 비상식량과 생수, 휴대용 라디오와 건전지, 라이터와 파이어스틸, 은박담요, 파라코드 팔찌, 스위스 칼 등을 넣어 현관에 두었다. 그리고 평소에도 작은 파우치에 호루라기, 포도당 캔디, 휴대용 방독면, 작은 손전등을 넣어 항상 가지고 다니고 있다. 생각해보면 굉장히 웃긴 일이다. 죽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 건강한 사람들은 대부분 굳이 생존배낭 같은 것을 준비하지 않는다. 그런데 맨날 죽고 싶다 죽고 싶다 노래를 부르던 나는 생존배낭을 싸고 재난 시 대처 요령을 익혔다. 만일 재난 상황이 발생한다면 오히려 내가 건강한 사람들보다 살아남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얼마 전에 지진이 났을 때,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멍하니 휴대폰을 보다가 문득 침대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고, 바로 지진이라는 느낌이 딱 왔다. 그리고 약 2초 후 재난문자가 도착하기 직전, 그 찰나의 시간 동안, 내 시선은 현관에 있는 내 생존배낭으로 향해 있었다. 재난 문자를 읽고, 본가에 있는 가족들에게 안부를 묻고 나자, 갑자기 이 모든 것이 웃겼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나는 사실 매우 살고 싶었던 것이다. 다만 그렇게 괴롭게 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이전부터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지만, 이번 일로 너무나도 확고부동해졌다.

한편 나는 운 좋게 죽음을 보다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또 다른 관점에서 볼 기회를 만날 수 있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첫 번째 대학 입시를 우여곡절 끝에 대차게 말아먹은 나는 고민 끝에 반수를 택했다. 다음 수능 때까지 재수학원에 갇혀 또 그 끔찍한 수험생활을 할 자신이 없어 부모와 함께 고심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어차피 곧 떠날 학교에 미련이 없었던 나는 시간표를 잘 짜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적당히 자리 남고 흥미 있어 보이는 교양을 하나 들으려다가 수강 신청을 한 것이 ‘삶과 죽음의 철학’이라는 강의였다.

‘삶과 죽음의 철학’에서 다루는 ‘삶의 철학’은 행복학이었고, ‘죽음의 철학’은 죽음학이었다. 행복학도 재미있었지만, 강의계획 상 전반부에 했던 죽음학에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다. 철학과에서 개설하는 강의이다 보니 주로 죽음과 관련된 여러 가지 윤리적 문제를 다루었다. 죽음은 사실 여러 가지 차원의 문제가 층층이 쌓여 있는 것이었고, 단순히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뇌사 시 장기기증의 여러 가지 사례와 이를 둘러싼 논란에 관해 이야기했다. 또 어떤 날에는 안락사와 존엄사에 관해 배웠다. 약물과 기계를 사용해 불치병 환자 130여 명의 자살을 도와 유명해진 ‘죽음의 의사’ 잭 케보키언(Jacob “Jack” Kevorkian, 1928-2011)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You Don’t Know Jack>을 보고 그의 행위가 정당했는지를 두고 토론하기도 했다.

강의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사전의료의향서라는 것을 써보는 활동이었다. 사전의료의향서란 나중에 연명의료 및 호스피스를 어떻게 받고 싶은지에 대해 미리 문서로 작성하는 것이다. 본인이 멀쩡할 때 이런 문서를 미리 써놓는다면 갑자기 위급한 상황이 닥쳐왔을 때 가족은 물론 의료진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법적인 효력을 발휘하려면 보건복지부에서 지정한 등록기관에 가서 상담을 받은 뒤, 문서를 작성해서 정식으로 연명의료 정보처리시스템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해야 한다. 내가 강의에서 작성했던 것은 공식적인 서식도 아니었고, 그저 일종의 체험에 가까웠다.

강의에서 받았던 양식에는 심폐소생술, 기관지 절개 후 호흡을 위한 튜브 삽입, 영양 공급, 혈액 투석, 진통제 투여 등 다양한 항목이 나와 있었다. 나는 기관지 절개는 받고 싶지 않다고 체크했다. 평소에도 호흡기가 좋지 않아서 고생했는데,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굳이 그렇게 숨을 쉬려고 기관지를 가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최대한 덜 고통스럽게 갈 수 있게 진통제는 아낌없이 팍팍 맞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나중에 생명이 위독할 때 어떤 치료를 받을 수 있는지, 그리고 결국에는 어떻게 죽어갈 수 있는지 스스로 결정한다는 사실이 나에게 어떠한 통제감을 안겨 주었다. 죽음조차도 내가 어느 정도는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어떤 방식으로 나의 삶을 끝장낼지 고민하는 자살 충동과는 엄연히 달랐다.

이렇게 좀 더 머리가 커서 다시 보게 된 죽음은 생각보다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나의 목숨과 타인의 목숨을 다르게 저울질하고 있었고, 그렇게 된 데에는 신경전달물질의 영향도 어느 정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살고 싶었고, 상담과 약물치료를 받으면서 나를 죽이려는 시도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죽음을 인간의 실존 또는 감정뿐만 아니라 현실의 여러 차원에서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4/

자살하면 가족과 친구들이 슬퍼하기 때문에, 혹은 그들에게 민폐가 되기 때문에 자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참 싫어한다(실제로 죽음학개론 책에서 본 말이다). 물론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죽음, 특히 자살이 주변인들에게 주는 충격과 아픔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 가족이 자살의 원인이 된 경우도 수없이 많다. 내 지인 중에서는 가정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어떻게든 가족과 떨어지기 위해 자발적으로 정신과 폐쇄병동에 입원한 사람도 있었다.

오히려 나는 내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혹여나 민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수시로 싸우게 된다. 지금도 가끔 별안간 치밀어 오르는 자기혐오로 인해 버티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다. 정신 상태가 굉장히 좋지 않을 때는 환경 문제를 접해도 자살 충동에 시달리게 된다. 괜히 살아 있으면서 식량만 축내고, 온실 가스나 배출하며 환경을 파괴하는 나라는 존재. 차라리 죽어 없어지는 게 모두에게 더 낫지 않을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민폐가 된다는 말은 아무 데나 갖다 붙이기에 얼마나 좋은 표현인가. 그야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다. 가령 우리의 호모 친구들이 아무리 가난한 사람을 돕고 이웃에게 베풀며 옳은 일을 위해 싸워봤자, 차별금지법이 동성애 법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차피 건전한 성 관념을 파괴하는 문란한 성 중독자일 뿐이다. 다른 성 소수자라고 해도 결론은 별반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또 이런 이야기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교회에서 나는 이성 교제와 관련하여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아주 모범적이고 독실한 청년이다. 하지만 결혼 및 자식 계획이 없는 나는 감히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주님의 뜻과 국가에 대한 의무를 저버린 이기적인 철부지일 뿐이다. 이렇게 순식간에 사회에 민폐를 끼치고 국가 유지에 해악이 되는 존재가 된다. 그럴듯해 보이는 궤변 한 마디로 순식간에 누군가의 삶을 가치 없는 것으로 깎아내리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다. 단지 ‘민폐’가 된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어도 되는 목숨이란 없다.

나는 내가 어떤 면에서는 원래 그냥 이런 인간이라는 점을 자각한 것이 나의 죄책감과 자살 충동을 덜어내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이 인생에서 아주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했을 시절에는, 그런 것을 못 하는 내가 어딘가 부족하고 문제가 있는 인간인 줄 알았다. 내가 누군가와 연애를 하는 상상을 하려고 했을 때 저절로 몸서리치는 나를 보면서, 이래서 나는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을 자격도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그냥 에이로맨틱 에이섹슈얼이었을 뿐이었다. 내가 여느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이 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은 마치 부싯돌로 얼음을 얼리라는 것과 같았다. 애초에 그냥 안 되는 것이었다. 될 리가 없었다.

거기서부터 인정하기 시작하자, 그다음은 쉬워졌다.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예민한 성격, 우유부단함, 항상 미리 못하고 마감 시간에 쫓기는 게으름……. 내가 그토록 증오하고 원망하던 내 결점들을 전보다는 덜 고통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만약 내 결점 때문에 피해가 발생한다면, 피해를 본 사람에게 진심을 다해 사과하고, 피해를 수습하고 복구하는 데 힘쓰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고쳐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성적 지향처럼 애초에 결점이 아니며, 고칠 수도 없고, 억지로 고쳐서도 안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어느 것도 내가 죽어야 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또 한편으로는, 자기혐오에 빠져 어떤 방법으로 죽어버릴까에 몰두하기보다는, 좀 더 차분한 태도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면 좋을까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했다. 사실 죽는 것 자체는 이제 그다지 두렵지 않다. 하도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다 보니 다다른 결론이었다. 무서워한다고 해서 안 죽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떠나는 건 이래저래 별로인 것 같다. 특히 이 나라처럼 고인과 관련된 법적인 모든 것이 철저하게 정상 가족 중심적인 나라에서는 말이다.

동성 배우자에게는 어떠한 권리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느 날 문득 내가 갑자기 죽으면 내 재산은 누가 물려받게 될지 궁금해진 나는 상속법을 찾아보다가 법정상속 순위가 자식, 손자 및 배우자 - 부모, 조부모 및 배우자 – 배우자 단독 - 형제자매 – 4촌 이내 방계혈족 – 사실혼 배우자 – 국가 순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발견했고,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아무튼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죽음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가기를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무엇이든 준비가 될 수 있다. 미리 법적으로 유효한 유언장을 작성해서 상속을 못박아둘 수도 있고, 동성혼 법제화 혹은 생활동반자법을 위해 싸울 수도 있다.

나는 잘 살고 싶고, 잘 죽고 싶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되기를 정말 간절히 바란다. 잘 산다는 것은 내가 나를 더는 채찍질하지 않는 삶을 말한다. 꼭 무언가를 나서서 하거나, 최선을 다해 치열하게 사는 것까지는 필요 없을 것 같다. 그저 나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도 일단은 충분하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나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잘한 점과 잘못한 점이, 행복했던 일과 불행했던 일이,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이 모여 나를 이룬다. 이 중에서 가볍다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별로 없다.

대부분의 사람이 흔히 다른 사람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기에, 보통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처럼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같이 다른 사람을 존중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그 반대였다. 다른 사람은 한없이 소중한 반면에 나 자신은 가치 없고 비천하다고 여겼다. 언뜻 보면 바람직한 삶의 태도인 것 같지만 이것이 지나쳐서 나는 불행해졌다. 그래도 이런 성격의 장점은 분명히 있었다. 나는 내가 지나온 불행을 돌아볼 때마다 늘 이런 고통을 겪는 사람은 나 하나로 충분하다고, 내가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지금은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나 자신을 아끼는 것이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잘 사는 것만큼이나 잘 죽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나는 내 퀴어 친구들이 더는 삶에 지쳐 자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죽는 것이 슬프거나 나쁜 일이라서 그렇다기보다는, 그들이 그런 선택에 내몰리기까지 겪어야 했던 그 무수한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서 그렇다. 나 또한 그 심정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런 불행은 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 소수자가 아니더라도 이미 충분히 잘 죽는 것이 어려운 세상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누구든 간에 태어나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는 것처럼, 세상을 떠날 때도 똑같은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 인간이라면 언젠가는 맞이해야 하는 그 마지막을 다들 충분한 존중과 보호 아래 잘 준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아직도 나의 자존감은 멀쩡하지 않다. 여전히 내 목숨이 다른 사람의 목숨만큼이나 무겁다는 것이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 때때로 나는 치밀어 오르는 자기혐오와 싸워야 한다. 그렇지만 이 문제가 앞으로 완전히 해결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그런 모순을 끌어안고 어떻게든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덕트 테이프를 여기저기 둘둘 감은 기계가 어찌어찌 작동하듯이, 누더기같이 여기저기 기워낸 코드가 당최 어떤 방식인지는 몰라도 일단은 결과물을 출력하듯이,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나 또한 그럴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이왕이면 잘 살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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