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타늄디옥사이드, 실리콘오일, 적색202호
요사이 화장품 성분분석으로 이름난 모 유튜버의 콘텐츠를 보는 데 푹 빠졌다. 내가 예전부터 쓰던 것이 성분이 좋다는 판정을 받으면 괜히 내가 기분이 좋아진다. 해로운 성분이 덜 들어간 화장품이 저렴하거나 제품력까지 좋으면 금상첨화이다. ‘착한 화장품’이나 ‘Top of Top’에 올라간 제품들을 열심히 기록한다. 이참에 너무 오래 쓴 색조 화장품을 싹 다 버리고 하나씩 하나씩 새롭게 사서 다시 채워 나가볼까도 생각해본다.
하도 다양한 종류의 화장품 성분 분석 포스트를 보다 보니까, 이제는 대충 목록만 보아도 어떤 성분이 좋지 않고 어떤 성분이 괜찮은 것인지 얼추 눈에 들어온다. 비에이치티는 발암물질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쓰더라도 그 함량이 적은 화장품으로 써야 한다. 피이지는 사용감을 좋게 하지만 피부염과 피부알레르기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좋다. 광물성 원료인 탤크는 무석면 인증을 받은 제품을 사용해야 한다. 티타늄디옥사이드는 무기 자외선 차단에 꼭 필요한 성분이지만, 결코 피부에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폴리에틸렌, 아크릴레이트코폴리머 같은 미세플라스틱은 여기 다 늘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종류가 많다. 한편 기초 화장품과 달리 색조 화장품에는 실리콘오일이나 인공 색소 같은 성분에 좀 더 너그러워질 수밖에 없다. 특히 적색202호, 적색218호 등의 인공 색소는 색조 화장품의 핵심이니 말이다.
이렇게까지 따지고 또 따지면 정말 안심하고 살 만한 화장품이 별로 남지 않는다. 여기에 동물실험을 하지 않은 제품이나 비건 화장품까지 생각하려면 그냥 차라리 아무것도 안 사는 게 낫다. 나름대로 내 피부 건강을 지키기 위해 매끈한 도자기 같은 피부, 잘 익은 홍시 같은 예쁜 입술, 울어도 끄떡없는 선명한 눈매를 포기해왔다. 하지만 화장품 업계는 끊임없이 성분을 바꾸고, 기능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낯선 이름의 새 성분을 계속해서 만들어낼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힘이 빠져버린다. 너무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때때로 지나친 앎은 우리를 번뇌에 밀어 넣기만 할 뿐이다.
사실 이상한 성분으로부터 내 피부를 지켜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화장을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다. (근데 또 생각해보니 자외선 차단제는 발라서 닿는 여러 가지 성분보다 자외선이 더 해로운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 온 식구가 차를 타고 가던 와중에 운전하던 아버지가 온갖 화학물질 덩어리인 화장품을 얼굴에 발라서 뭐가 좋냐고 잔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지금 타고 가는 자동차야말로 온통 그런 화학물질투성이가 아니겠냐고 대꾸했다. 차 안이 조용해졌다. 아버지는 그 주제에 대해 더는 말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화장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행위이다. 티타늄디옥사이드, 실리카, 산화철, 페녹시에탄올 등 이름만 들어도 뭔가 수상해 보이는 물질을 주로 얼굴 위에 겹겹이 바른다. 모든 물질은 아무렇게나 얹히는 것이 아니고 제각기 알맞은 역할과 장소가 정해져 있다. 맨얼굴은 어떻게든 감춰줘야 하며,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여러 가지 화학물질이어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는, 화장은 단순히 여러 가지 이상한 이름의 물질을 덧발라 색과 윤을 내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나는 또래에 비해 화장을 굉장히 늦게 시작했다. 수능을 볼 때까지 색조 화장은 물론이거니와 피부 화장에도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스킨로션과 자외선 차단제만 챙겨 발랐다. 피부 화장을 안 해도 클렌징폼을 쓰면 좋다길래 하나 샀긴 샀었는데, 거의 쓴 적이 없었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때 점심시간만 되면 각자 거울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화장을 고치는 또래들의 모습이 나에게는 굉장히 신기했다.
그리고 화장품을 단속하려 드는 교사와 어떻게든 사수하려는 또래들의 매일 같은 신경전은 그들이 분명히 나와는 다른 존재라는 생각을 곱씹어 보게 했다. 친구도 많고, 자기들만의 놀이를 즐길 줄 알고, 때로는 어른들의 부당한 통제에 저항할 수 있는 활기차고 사회성 좋은 인싸와, 맨날 혼자 다니고, 자신감도 주체성도 없고, 그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를 뿐인 왕따. 그렇지만 나는 겁쟁이인 데다가 모범생 취급받는 것이 좋아서 감히 따라서 화장을 할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그래서인지 어쩌면 은연중에 내가 화장에 부당한 통제에 대한 반항의 의미를 투영했을지도 모르겠다. 수능이 끝나고 내가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친구들을 졸라서 내 생애 첫 화장품을 사러 간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학교에서 화장을 금지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 심리인데. 화장한 중고등학생을 보면 ‘아침부터 저 친구들 굉장히 부지런하구나.’ 뭐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아무튼 다 지나간 일이다. 이제는 내가 아무리 화장품을 막 사려고 해도 나를 방해하는 것은 빈곤한 내 지갑 사정밖에 없다. 그동안 내 화장 기술도 많이 발전했다. 활자 중독답게 인터넷에서 하도 검색을 많이 하다 보니 성분 분석이니 퍼스널 컬러니 하는 이론에 대해서는 제법 그럴듯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내 색조 화장품들을 보아하니 나는 가을 웜톤일 가능성이 높은데, 아직 진단을 받아보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예전처럼 화장에 대단한 의미를 불어넣지는 않는다. 어느덧 내가 가진 입술 화장품만 10개가 넘었고, 마음만 먹으면 한 방에 아이라인을 그릴 수 있게 된 지금, 화장은 하면 좋지만 막상 하려면 귀찮은 뭐 그런 것이다.
나는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연출하기에 화장은 쓸 만한 도구라는 것은 틀림없다. 이른바 환불 메이크업이 괜히 그런 이름을 갖게 된 게 아닌 것 같다. 나는 늘 강해 보이고 싶어 한다. 감성적이고 눈물도 많고 여리디여린 내 진짜 모습을 티 내고 싶지 않다. 특히 전공 수업에서 마주치는 별로 안 친한 헤남 선배들 같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그럴 때면 음영 메이크업도 또렷하게 넣고, 아이라인을 검은색으로 진하게 그리고, 입술도 진하게 칠한다. 일종의 가면 같기도 하다. 그 속의 내 여린 모습을 감춰줄.
물론 나도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내 모습을 신경 쓰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시간과 노력을 들여 강해 보이도록 화장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허술해 보이지 않겠다는 각오이자 절대로 기죽지 않겠다는, 스스로에게 하는 일종의 다짐 같은 셈이다. 이렇게 쓰니까 무슨 지구 반대편의 어느 부족에서 전쟁하기 전에 주술적 의미로 새기는 문신처럼 들린다. 여하튼 나는 이런 식으로 내가 보이고 싶은 내 멋진 모습을 만들어내기 위해 화장을 여러모로 잘 써먹고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 온다.
혹시 내가 은연중에 화장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 동참하고 있지는 않을까. 오늘도 철없이 현실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래저래 여러 가지 의문이 들면서 마음속이 한없이 복잡해진다. 화장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향하는 따가운 눈초리는 분명한 현실이다. 맨얼굴을 내밀면 마치 부끄러워해야할 것만 같고, 예의도 성의도 없는 ‘안구 테러범’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학생 때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난리더니, 막상 어른이 되니까 왜 하지 않냐고 묻는다.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점에서 탈코르셋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에는 생각해볼 만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우리를 교묘하게 옭아매는 사슬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얼굴, 즉 혈색 있는 입술, 크고 선명한 눈, 오똑한 코에 대한 동경이 사실은 사회에서 우리에게 주입한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화장품 회사에서는 계속해서 소비를 유도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내고, 잘 쓰고 있는 베스트셀러를 굳이 단종시킨 뒤 새로운 상품을 출시한다. 어떨 때는 그런 상술에서 과감히 벗어난 그들이 어찌되었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러한 억압을 박차고 나온 진짜 나의 마음은 대체 뭘까? 내 외모가 어떻든 나 자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 그건 또 진짜라고 부를 수 있으려나? 유감스럽게도 거기에 장단을 맞춰줄 생각은 별로 없다. 이런 식으로 대체로 순수한 것, 완전무결하게 나의 것을 찾으려는 시도는 늘 언제나 실패한다고 생각한다. 당장 단일민족이라는 허상을 찾는 시도가 그러하지 않은가. 부당한 사회화를 당해온 나지만, 그런 내가 나 자신이 되지 못할 이유를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무심코 해오던 내 행위에 대해 어느 날부터 고민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너무 어렵고 피곤한 일이다. 쓰다 보니 내가 화장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말은 아무래도 거짓말인 것 같다. 오늘도 히알루론산이 나에게 괜찮은지 고민하고, 옷에 맞춰 어떤 얼굴로 나가야 할지 고르고, 내가 화장을 하는 게 맞긴 하는지 되묻는다. 그러나 이 모든 행위가 헛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이러한 고민들이 모여 더 나은 날을 만들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꾸미거나 꾸미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올 거라고, 그렇게 조금은 희망을 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