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A를 위하여

스에
January 1, 0001

기(起)

내가 처음으로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진 세상에 의문을 느낀 건 대략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초등학교 4학년 정도 되었던 것 같다. 그즈음에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처음으로 ‘군대 vs 출산’이라는 정제되지 않은 싸움을 마주하게 되었다. 너무나도 유치하고 멍청하기 짝이 없었던 흔한 키보드 배틀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다. 아무튼 나는 수많은 글자를 읽어 내려가면서 왠지 모를 역겨움을 느꼈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내가 남자도 여자도 아무것도 아니었으면…….’라는 것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때 들었던 생각은 어떻게든 갈등을 피하고 싶어 상황을 회피한 것에 가깝다. 가뜩이나 지금도 갈등을 몹시 싫어하는 나인데, 처음으로 사람들의 고집과 무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키보드 배틀을 목격한 어린 날의 나에게는 그 상황이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이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또 기록하는 것은, 이 사소한 생각을 시작으로 성별 이분법 위에 견고하게 세워져 가던 나의 세계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 누릴 수 있었던 행운 중 하나는 비교적 성별 이분법에서 자유로운 가정에서 자라났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맏이로 태어난 나를 ‘집안의 대들보’라고 곧잘 불렀다. 보통 앞으로 집안을 이끌어나갈 ‘기둥’이나 ‘대들보’라는 수식어는 주로 아들, 그것도 맏아들에게 붙는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딸이든 아들이든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부모님은 내가 남자 못지않게 강하고 씩씩한 사람이 되길 원했다.

부모님의 소망이 통했던 것일까? 나는 싹싹하고 붙임성 좋고 애교가 많기보다는, 무뚝뚝하고 멋없고 털털한 성격으로 자라났다. 보편적이거나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여성의 성격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힘들긴 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의 나도 다른 여자아이들과 계속 충돌하면서 이러한 차이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여자가 맞는 걸까?’ 하면서 괴로워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내가 공간 지각 능력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점도 나의 고뇌를 부추겼다. 그때는 여성은 남성보다 공간 지각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지도도 잘 못 읽고 운전도 잘 못 한다는 편견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때였으니까. 그러면서도 나는 그 누구보다도 감성적이고 공감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혼란스러웠다. 대체 나는 남성도 여성도 아니고 누구란 말인가?

승(承)

큐이즈에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나는 그럭저럭 여성의 범주에 순순히 들어가는 편이었다. 희미한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젠더 정체성에 대해서는 그다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가입 메일에는 특별히 젠더에 대한 언급 없이 에이로맨틱 에이섹슈얼이라고만 썼다. 그러고 나서 아마도 나는 암묵적으로 여성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았다.

어떻게든 많은 사람과 만나서 어울리고 싶어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새내기 시절에, 우연히 큐이즈 여성 톡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살짝 겁이 났지만, 친구에게 부탁해서 들어갔다. 거기서 특별히 별다른 일은 겪지 않았다. 그다지 활발히 돌아가는 톡방도 아니었다. 하지만 입장하고 처음 톡방을 훑어보았을 때의 알 수 없는 위화감은 잊을 수가 없다.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 고립감, 거리감……. 어쩌면 여성애자들이 주를 이루는 곳이었기 때문에 무성애자가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그 이후로 젠더 정체성을 고민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용어를 알고 있는 상태였기에, 에이섹슈얼이나 에이로맨틱을 고민할 때보다는 훨씬 적은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내 정체성에 마지막 A를 덧붙였다. 에이젠더(Agender). 남성도 여성도 아무것도 아닌 상태. 성별 정체성 없음. 초등학생 때의 내가 나에게 바라던 이름. 에이섹슈얼, 에이로맨틱처럼 아주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훨씬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편안해진 것은 나를 바라보는 내 시선뿐이었다. 오히려 세상에는 불편한 것이 자꾸만 늘어났다. 홈페이지 회원가입을 할 때, 성별을 묻는 칸에서 전처럼 무심히 넘어가기가 힘들었다. 가능하면 남성도 여성도 아닌 것을 선택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선택지가 두 개뿐인 경우에는 ‘지정 성별을 묻나 보다’하고 내 멋대로 생각하고 여성에 체크한 뒤 넘어가기 일쑤였다. 아마 귀찮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임시방편이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얼마 전에는 교생실습을 나갔다 왔다. 그 어떤 상황에서보다도 명확하게 나는 여성으로 패싱 되었다. 얼마 안 되는 예산으로 슬랙스를 돌려 입는 것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살면서 그렇게 자주 치마를 입었던 적도 처음인 것 같다. 교생 목록에 적혀 있는 내 이름 옆에는 ‘여성’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아마 학교 현장에서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존재를 상상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아직 세상은 갈 길이 멀다.

전(轉)

어슐러 르 귄의 《어둠의 왼손》은 게센이라는 행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게센에 사는 사람들은 지구인과 다르다. 그들은 평소에는 양성을 모두 지닌 ‘소메르’ 상태에 있다가, 26일 주기로 일종의 발정기인 ‘케메르’ 상태에 접어들면 남성과 여성 둘 중 하나로 발현되고, 여성이 된 이는 임신을 할 수 있다. 언뜻 보면 우리의 생각으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생태이다. 그렇지만 게센인의 입장에서는 남성 혹은 여성으로 있는 지구인은 늘 케메르 상태에 있는 ‘변태’인 셈이다.

게센인이 지구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가끔 나는 내 몸에 달린 성기를 매우 낯설게 바라본다. 일단 겉으로 드러나는 클리토리스와 호르몬의 영향을 받아 부풀어 오른 유방. 내가 가지고 태어났지만, 별로 내 것처럼 느껴지지 않은 것들. 좀 더 거칠고 섬뜩하게 이야기하자면 나에게 유방은 ‘잠재적인 암 발생 조직’에 지나지 않는다. 당연히 월경도 달갑지 않다. 생리대 대신에 생리컵이나 탐폰 같은 것을 쓰고 싶다고 계속 생각하지만,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은 삽입도 삽입이지만 일단 내가 내 클리토리스를 보는 것을 못 견디기 때문이다. 내가 가지고 태어났으니 신체적인 거부 반응은 없되, 대신에 심리적으로는 거부 반응이 있는 셈이다. 마음 같아서는 별다른 이상 없는 내 클리토리스와 질, 포궁을 들어내서 갖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주고 싶은 심정이다.

이건 젠더 디스포리아가 아니라, 그냥 내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냐고? 내 버킷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항목 중 하나는 죽기 전에 선명한 복근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운동하면서 매달 닭가슴살을 30팩씩 사서 매일 한 끼를 먹고 있다. 내 몸을 아껴준다고 말하기는 좀 뭣하고, 적어도 애착 내지는 집착을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계속 가지고 잘 살아 보고 싶으니까 운동도 꾸준히 하고 먹는 즐거움을 포기하면서까지 근육을 키우고 하는 것이다.

사실 내가 가장 바라는 나의 몸은 XX이든 XY이든 성염색체가 아예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에서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다. 내가 생물을 고등학교 때 마지막으로 배우고 한참을 놓았기 때문에, 마침 생물학을 전공하고 있는 동생에게 성 염색체가 하나도 없는 인간이 성립 가능한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다들 예상하다시피, 결론 성 염색체가 아무것도 없는 인간도 인간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존재하기는 힘들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나는 이번 생애에는 태어난 이 몸 그대로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 같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논 바이너리 트랜스젠더들과 ‘젠더 디스포리아는 공짜’라는 자조적인 농담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호르몬 요법과 같은 수단을 거친다고 해도 결국 신체를 원하는 모습으로 바꿀 수 없기 때문에, 굳이 돈을 들여 수술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언제나 내 마음속에는 이룰 수 없는 몸에 대한 갈망이 있을 것이다.

결(結)

고고학자는 도자기 파편, 부싯돌 조각, 담벼락 하나, 무덤 한 채 등 아주 간단한 것으로부터 많은 정보를 끌어내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만난 고대 문명이 아주 복잡하다면, 기술 문명 말고 다른 방면으로 복잡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예로 들어보자. 그리고 햄릿의 사본을 발견한 고고학자가 인간이 아니고, 책이나 연극도 없으며,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말하지도 쓰지도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럴 경우, 복잡성과 목적의식이 뚜렷한 물건이면서 어떤 요소는 반복이 되고 또 어떤 요소는 반복되지 않으며, 줄 길이 등 어느 정도 규칙성이 있는 조그만 인공물을 그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그들이 어떻게 《햄릿》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어슐러 K. 르 귄, 《바람의 열두 방향》

세상에는 우리가 몹시 당연하게 여기는 사실이 몇 가지가 있다. 하지만 내가 끊임없이 세상과 부딪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사실 그 뒤에는 보이지 않은 수많은 맥락과 전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성별 이분법이 그중 하나였다. 남자와 여자 둘 중 어느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매우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리고 성별 이분법에 익숙했던 나 또한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결국 나는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나와 같은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의 젠더 디스포리아를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내가 아무리 쉬운 표현으로 글을 썼다 해도 끝내 이 글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햄릿》을 발굴한 외계인 고고학자가 책도, 연극도, 언어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어둠의 왼손》에 나오는 지구인 남성 겐리 아이와 게센인 에스트라벤이 서로의 생태와 그로 인한 차이를 완벽히 이해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큐이즈 동아리방에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을 편하게 여기는 이유 중 하나는, ‘형/누나/언니/오빠’와 같은 말을 붙이는 대신, 서로 존댓말과 함께 필명 혹은 별명으로 부르며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말로도 부르고 싶지 않고 어떤 말로도 불리고 싶지 않다. 이렇게 나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하기에는 수많은 고민거리와 마음 한구석의 찝찝함이 나를 매일 크고 작은 궁지에 몰아넣는다.

아마 앞으로도 내 몸은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나와 갈등하는 것은 내 몸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그저 나대로, 내 마지막 A를 위해 살아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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