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지나간 자리

스에
January 1, 0001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4-7

아주 오래되었고, 때로는 진부하거나 시시한 말일 수도 있지만, 아직도 깊은 울림을 주는 구절이에요. 여기에서 나오는 사랑은 따스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해요. 이런 사랑을 받는 이는 참 행복할 거예요. 아니면 이런 사랑을 주는 것은 어떨까요.

나는 항상 내 가족, 내 친구들이 행복하기를 바랐어요. 그들이 웃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행복해졌어요. 나는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사랑해왔었어요, 매우 익숙한 과정이었어요. 사랑은 나의 원동력이자 삶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살아오면서 수많은 연인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어요. 곧 내 모습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언제나 그들은 나에게 철저히 타인이었어요. 서서히, 나와 저들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해졌어요. 아주 오랫동안 수많은 질문 속을 거닐었어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딱 한 마디예요. ‘나는 내가 저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랑’이란 말은 참 못할 말처럼 느껴졌어요. 오해받기 싫어서 하트 모양 기호를 일부러 피하기도 했어요. 사랑이 두 사람 간의 가슴 떨리는 감정과 긴장감, 연애와 그에 수반되는 행위만을 이르는 말이라면, 나는 거기에서 아주 한참 벗어난 사람이에요. 바깥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를 그곳으로 밀어 넣어요. 그게 싫어서 계속 발버둥 쳤어요. 그러면서도 나는 스리슬쩍 상상을 시작해요.

내 옆에 빈칸을 하나 만들어 놓아요. 그리고 거기에 수많은 사람을 대입해요. 예전에 나를 좋아했었다고 고백한 지인. 오랜만에 만난 나에게 “예뻐지셨네요.”라고 말을 건넨 사람. 나 같은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말하던 과 동기. 나에게 어설픈 접근을 시도하던 다른 동아리 선배. 만나면 인사 대신 포옹을 할 정도로 친밀한 동아리 사람. 지하철에서 번호를 묻던 이름 모를 사람. 혹은 길거리에서, 학교에서, 고향과 서울을 오가는 기차 안에서, 스쳐 지나간 나의 진정한 ‘인연’이 있지는 않았을까요.

나는 얼마든지 매력적으로 굴 수 있어요. 나도 사랑스럽고 헌신적인 연인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귓가에 달콤한 사랑의 언어를 속삭이고, 진한 키스를 나누고, 한 침대에 누워 뒹굴며 서로의 몸을 탐할 수도 있어요. 내가 원한다면, 원한다면, 언제든지.

정말 그런가?

문득, 마치 주문을 외듯 ‘원한다면, 원한다면.’이라고 강박적으로 중얼거리는 나 자신을 발견해요. 정말로 원해왔다면, 주문을 욀 필요도 없이 나는 그렇게 해왔겠지요.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분명히 존재하지만, 말이 안 되는 생각들이에요.

하지만 아무렴 어때요. 지금 나는 가정을 하고 있어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내가 둘러쌓은 성벽을 넘으려 해요. 현실을 뒤틀어보아요. 억지로 생각을 그대로 밀고 나가요.

내가 지금까지 수없이 보고 배웠던 모든 로맨스를 동원해보아요. 그 자리에 나와 상대를 넣고 머릿속에서 재생시켜요. 그러나 상상은 보이지 않는 벽에 탁 부딪혀 흩어지고, 결국 식어가는 촛농처럼 하얗게 굳어가는 사고만 남아요. 언제나 결론은 그래요. 나는 모르겠다.

내가 퀴어임을 증명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요. 내 인생에서 앞으로 영원히 로맨스는 불가능할 거라고 결론을 내리고 싶었던 걸까요. 때로는 나와 상대를 속이고 성공적으로 연인 구실을 하는 것까지 생각이 나아가요. 하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관두어요. 아마 나는 호기심으로 시작하겠지요. 나도 나름대로 상대를 사랑하겠지만, 그것은 상대가 주고받고자 하는 사랑과는 많이 다를 것이에요. 지금까지 서로 엇나가고 균형이 맞지 않는 사랑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너무 많이 보아왔어요.

언제, 어디서부터, 무엇 때문에, 왜? 라는 질문은 앞으로도 평생 나를 따라다니겠지요. 잠시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아요. 머릿속을 더듬거리며 찾아보아요. 조금만 건드리기만 해도, 기억은 울컥거리며 쏟아져 나와요. 그런 밤에는 아직도 괴로움에 몸부림쳐요.

침묵. 고립. 소외. 배척. 좀 더 친숙한 표현을 쓰자면 ‘은따’가 되겠지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고, 누구도 사랑하지 못했던 나날들, 나는 고3 생활을 날 싫어하는 이들과 하루에 16시간씩 교실에 갇혀 보냈었어요. 한때 가장 친했다고 생각한 이의 이간질로 한순간에 친구가 열 댓 명씩 떨어져 나가던 순간, 부모님께 제발 자퇴시켜 달라고 울며 빌었던 순간은 그보다 더 오래전이에요.

아픔을 꾹 참으며 계속 과거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요. 대체 어디서부터 동급생들과 틀어지기 시작한 걸까요. 어느덧 나는 초등학교 교실에 와 있어요. 이성 교제에도, 연예인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던 나는 급우들과 잘 맞지 않았어요. 단지 그것뿐이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모두 너무나 어렸어요. 사소한 오해와 충돌은 곧 불화가 되었어요. 내가 다니던 초중고는 한 골목에 나란히 붙어 있었고, 졸업하고 새로운 학교로 올라가도 나를 향한 악담과 뒷소문은 항상 나를 따라다녔어요. 내 눈에 비친 여학생들은 뒷담화의 화신들이었어요. 남학생들은 어땠느냐고요? 그들이 나를 놀리고 내 얼굴을 향해 신발을 던졌을 때,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어요.

사람에게 실망하고, 찢기고 시퍼렇게 멍이 든 채로 나는 그렇게 학창시절을 보냈어요.

나는 어느덧 좁은 학교에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왔어요. 한동안 학창시절은 완전히 잊고 지냈어요. 기억하기 싫어서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어요. 아무 상처도 없었던 것처럼 머릿속에서 다 지우고, 눈앞의 입시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어요. 비로소 대학에 와서 안정을 찾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그제야 내가 틀린 사람이 아니었음을, 내가 겪은 것들이 나에게 몹시도 가혹했음을 깨달았어요.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들. 나는 강해졌지만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되었어요. 때로는 숨겨놓았던 상처와 불안이 치밀어 올라 나를 힘들게 해요.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얼마 전에 뒤늦게나마 치료를 시작했어요. 상담을 받았고, 약을 먹기도 해요.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상처를 품어요. 동아리에서도, 과에서도 그다지 미움받지 않고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나를 아껴준 건 난생처음이에요. 비록 낯설어서 가끔은 온몸이 떨리지만, 나도 감춰두었던 손을 꺼내 되도록 많은 사람을 품으려고 해요. 비록 전혀 없었던 것으로 할 수는 없겠지만, 상처는 천천히 아물어 가요.

그리고 지금, 인간애를 잃은 것도 간직한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의 나만 남았어요.

나는 모두를 사랑하지만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요. 사람과 연애를 믿지 않게 된 데에는 분명히 내 경험에 뿌리가 있어요. 내가 시간을 만들어 내지만, 시간은 나를 만들기도 하니까요. 어쩌면 또 다른 기회가 있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지금 여기 있는 것은 일단 나 자신이에요. 나를 품어보기로, 믿어보기로 해요. 나는 나의 방식으로 세상을 사랑할 거예요.

오늘도 수많은 사람을 만나요. 하지만 내게 연애 상대로, 섹스 상대로 의미 있는 사람은 없겠지요. 하지만 나는 나와 친한 이들을 사랑해요. 그들에게 정성껏 인사를 건네요. 처음으로 나를 따뜻하게 대해준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라요. 함께 즐거운 나날을 보내기를 바라요. 어쨌든 나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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