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벽

스에
January 1, 0001

방금 들었던 말을 곱씹어 본다. ‘아직’이라는 말을 혀를 따라 이리저리 굴리어 본다. 그이의 말에 따르면 나는 아직 사람이라면 꼭 거치는 때를 ‘아직’ 겪지 않았을 뿐이다. 입맛이 쓰다. 그이는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르는 상상 속 미래의 내 모습을 완전하고 성숙한 나로 상정하고 있었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면에서 나는 미성숙한 사람이 맞다. 내가 모르는 세계는 너무나도 많다. 앞으로 나는 미지의 영역으로 발을 내디뎌 더 많은 것을 기억하고 또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되겠지. 하지만 당사자도 아니면서, 나조차도 아직 알 수 없는 내 미래를 단정하는 말을 듣는 것은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이 말은 내가 에이로맨틱 에이섹슈얼로 정체화를 하면서, 그리고 정체화를 하고 나서도 여러 사람의 입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변주되던 말이다. ‘아직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서 그런 거야’—작년 추석 때도, 올해 초에도, 올가을에도.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라 이제는 화도 나지 않는다. 아무 느낌도 없다. 때로는 그 무지를 지적하는 것조차 지친다. 항상 ‘없음’을 증명하는 일은 굉장히 힘들다. 무죄도 그렇고 무고도 그런 것처럼. 사실 내 정체성을 굳이 남들에게 애써 증명해서 인정받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가 말하지 않으면 완벽히 존재하지 않는 사람 취급당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난 분명 여기 있는데도.

사람들은 나에게 질문한다. “이상형이 어떻게 되시나요?” 받으면 짜증 나는 질문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대개는 선택지로 제시되는 연예인들을 잘 모른다는 핑계로 넘어간다. 하지만 내가 연예인들에게 관심이 많았다고 해도 나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이상형. 내 애인. 내 연애. 생각하려 들자마자 내 모든 사고가 정지한다. 뇌가 마치 식어가는 촛농처럼 하얗게 굳어져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보려 애써도 생각이 더는 진전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애인인 나,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여기에 ‘에이로맨틱’이란 이름을 붙이고, 이것이 이상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고립. 온 세상이 연애를 노래할 때 나는 철저히 유리된 존재이다. 연애하는 이들 가운데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나. 어떨 때는 내가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차라리 진짜로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 최소한 쓸데없는 간섭을 받을 일은 없을 테니까. 동아리에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들도 나와 같이 소외당한 이들이었고, 나를 비정상으로 보거나 고치려 들지 않았다. 나는 동아리 사람들과 그럭저럭 친해졌고, 트위터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동아리도 연애로 꽉 차 있었다.

사실 다른 사람이 연애를 하든지 말든지는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다만 나의 알로로맨틱 친구들은 끊임없이 연애를 갈망하고, 연애하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나 또한 누군가 연애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축하해주고, 혼자인 친구가 좋은 애인을 만나기를 바랄 뿐이다. 어쨌거나 나는 내 친구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니까.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속에 사는 것은 나를 몹시 힘들게 했다. 아무래도 동아리가 동아리인 만큼, 연애와 섹스 이야기가 안 나올 수가 없다. 그건 아무래도 좋다. 앞서 말했듯이 ‘남의 일’이니 그다지 신경 쓰이지는 않았고 오히려 흥미로운 이야기도 많았지만, 나에게도 한계가 있었다. 또한 이성연애(와 섹스)만 찾는 현실에서 어떻게든 달아나려 트위터에 접속해도, 온통 연애에 대한 갈망이 타임라인에 가득했다. 숨이 막혔다. 물론 사람들 잘못은 아니다. 그렇지만 결코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을 날것 그대로, 언제 끝날지 기약도 없는 채로 봐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한 번 이렇게 생각해보자. 당신이 아무리 바다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망망대해에서 보트 하나만 달랑 띄운 채 몇 날 며칠 동안 바다만 보고 있으면 괴로워지지 않을까? 반짝이는 물의 표면만 보아도 구토가 올라오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잠깐 쉴 만한 암초를 간절히 찾아 헤맸다.

어느 날 견디다 못해 트위터에 ‘에이로맨틱’이라고 검색해서 나와 같은 에이로맨틱 에이섹슈얼들을 찾아 무작정 팔로우했다. 그 사람과 굳이 교류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사람은 단순히 ‘에이로맨틱 에이섹슈얼’이라는 것만으로 같이 묶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타임라인에 연애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게는 크나큰 위안이 되었다. 함께 교류할 에이로맨틱 에이섹슈얼 트친이 생긴 것은 그보다 조금 훗날의 일이었다. ‘퀴어 트친소’ 계정에 올라온 자기소개를 보고, 항상 계정을 비공개로 해놓았던 내가 쪽지까지 보내면서 서로 팔로우하는 사이가 되었다.

드디어 찾은 나와 같은 사람들. 숨통이 조금은 트이는 기분이었다. 취향이나 취미가 비슷했던 것도 있지만 유성애중심주의, 연애중심주의에서 철저히 소외된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언제 말해도 좀처럼 결론을 내기 힘든 ‘연애란 무엇일까’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하더라도, 에이로맨틱 에이섹슈얼 친구분과의 대화와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대화는 그 느낌이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다. 대개 알로로맨틱과의 대화는 서로의 차이만 더 뚜렷히 확인한 채 끝나기 마련이었다. 반면에 로맨틱한 끌림에 함께 공감하지 못했던 에이로맨틱 에이섹슈얼 친구와는 꽤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도저히 이해받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영역에서 이해와 공감을 얻는 것은 분명히 짜릿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나와 같은 사람들을 찾아 다니는 것이 완전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잘 안다. 모든 퀴어들도 결국 퀴어가 아닌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나 또한 알로로맨틱들과 함께 섞여 살아가야 한다.

언젠가 어떤 이가 나에게 부럽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로맨틱한 끌림과 성적 끌림 때문에 고통 받을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이는 그 나름대로 힘들었겠지만, 그 말을 들으면서 기분이 참 복잡했다. 에이로맨틱 에이섹슈얼은 마치 신선처럼 구름 타고 두둥실 떠올라 지상에서 벌어지는 사랑싸움을 구경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알 수 없는 뒤엉킨 감정들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는 존재에 가깝다.

아무리 서로를 잘 알려고 한다 해도 나와 알로로맨틱 사이에는 결코 허물 수 없는 벽이 남아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최선을 다해봤자 유리벽일 것 같다. 아무리 친밀해져도 보이지 않는 벽이 여전히 견고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알로로맨틱들은 나와는 평생토록 삶의 궤적이 만날 수 없는 사이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은 비단 에이로맨틱과 알로로맨틱들 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유리벽이 존재하고 이것은 그중 하나다.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비록 영영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나는 잊혀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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