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6 - 시선의 이중성

파랑
September 22, 2007

〈1〉 상황 - 길거리에서 착한 몸매에 바람직한 얼굴을 한, 웃는 모습이 예쁘고 옷까지 잘 입는 연예인 같은 남자에게 세 명이 끈적끈적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성애자 남자

아 저 새끼는 왜 저렇게 잘 생긴거야, 피부에도 잡티하나 없네. 저런 새기가 꼭 여자들한테 살살 꼬리치고 다닌단 말야. 분명 머리는 안 좋고 성격도 드러울꺼야. 그리고 옷이 날개지. 나도 돈만 있으면 저 정도 입을 수 있지. 그리고 남자가 살도 좀 있고 그래야지 기생오래비처럼 저렇게 말라서 어디다 쓰겠어. 나도 시간이 없어서 운동을 못해서 그렇지 운동만 하면 여자들 벌써 다 넘어갔다. 내 여친이 저 새끼한테 눈을 못 떼네, 내가 훨씬 낫지.’

이성애자 여자

‘와 쟤 봐, 완전 멋있게 생겼네. 피부도 장난 아니네, 나보다 더 좋은 것 같아. 옷도 너무 예쁘다. 내 남친 옷 입는 센스가 쟤 반만 되도 좋을 것 같아. 저렇게 입으니까 왠지 부티도 나고, 아 웃는 모습 봐. 완전 순진해 보여. 저렇게 웃으니까 왠지 성격도 착할 것 같아. 내 남친은 성격도 드러운데. 혹시 바람둥이 아냐? 근데 정말 맛있게 생겼다.’

동성애자 남자

‘와 완전 식 된다. 얼굴, 몸, 옷 입는 거 딱 내 스타일이야. 10점 만점에 10점!! 근데 보니까, 눈이랑 코는 고쳤네 고쳤어. 나도 눈이 좀 작고 코가 낮아서 그렇지 고치면 완전 잘 팔릴껄? 근데 쟤 옷은 좀 끼스럽다. 담에 백화점 가면 찾아봐야겠다. 왜 내 주위엔 저렇게 생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 근데 꼭 벙개나가면 저렇게 생긴 사람 한명씩 있더라. 있으면 뭐해, 전부다 걔 좋아해서 난 찬밥 신센대. 안되겠다, 나도 얼굴하고 옷하고 피부에 돈 좀 발라야겠다. 아, 운동도 해서 살도 빼고 근육도 만들어야지. 아 근데 정말 잘생겼다.’

길거리에서 TV드라마나 영화에서 막 나온 것 같은 선남선녀에게 쏟아지는 욕망과 질투의 시선. 이런 시선을 몸에 국한시킨다면, 질투의 시선과 욕망의 시선이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성애의 경우라면 그럴 것이다. 이성애자 여자가 비에게 욕망의 시선을 보낼 순 있지만 질투의 시선은 보내지 않을 것이다. 김태희에게는 질투의 시선만을 보낼 것 이고. 이성의 몸을 질투하거나, 동성의 몸에 욕망을 느낄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동성애의 경우라면, 욕망의 시선과 질투의 시선의 경계는 어떻게 될까?

〈2〉 많은 사람이 운동을 한다. 어떤 사람은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운동을 하겠지만, 대다수는 근사한 몸을 만들기 위해 운동을 한다. 터질듯 한 같은 커피색 근육과 얇은 허리와 예쁜 S라인은 남성미와 여성미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미디어에서 쉴 새 없이 튀어나오는 소위 ‘착한’ 몸매의 연예인들은 일반남녀의 질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히 멋지다. 권상우나 이효리 같은 멋진 몸매를 상상하며, 운동을 한다. 운동을 하거나 성형수술을 함으로써 자신의 몸을 미적기준에 충족시키려고 하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몸에 대한 재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애자가 단지 질투나 부러움의 시선으로 연예인을 바라보며 몸을 재단한다면 동성애자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우리가 연예인에게 보내는 시선은 질투와 부러움인 동시에 욕망의 시선인 것이다.

내가 아는 게이친구는 90kg~110kg의 우람하고 살이 많은 남자를 좋아한다. 그 친구의 몸무게는 65kg으로 보통이거나,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약간 통통한 정도지만 살을 찌우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그 친구는 살을 찌우면 찌울수록 예뻐진다고 생각하고, 찌우기 위해서 식사량을 인위적으로 늘리거나, 케이크 같은 칼로리가 높은 음식을 골라서 먹는다.

이는 현대 사회의 미적 기준과는 거리가 멀다. 메스미디어에서 세뇌시키듯 보여주는 ‘미적 기준’인 원빈 같은 꽃미남이나, 권상우 같은 몸짱에 연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거스른다. 미적기준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본다면 흐름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흐름을 역류해서 자신의 성적욕망의 대상과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이러한 ‘비주류’적인 미적 기준을 적용시키는 친구의 사례는 다소 의아하다.

그 친구는 자신을 자신의 성적욕망의 틀에 맞추려 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몸을 자신의 성적욕망으로 재단하는 것이다. 자신의 몸을 자신의 성적 욕망의 대상과 닮고 싶어 하는 것, 이를 미적기준으로서의 성적욕망 이라고 표현 할 수 있겠다.

〈3〉 이성애자, 특히 이성애자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재단은 외부에서 출발한다. 가부장제의 기득권층인 남성의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재단인 것이다. 이 타자로부터 시작된 미적 기준은 남성들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성적 대상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미적 기준은, 상품화 되고 심지어 자산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물론 이런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철저히 소외된다. 이런 타자의 재단은 이성애자에게, 특히 여성에게 압박 혹은 억압으로 가해지며, 전 사회적인 문제와 연결되기도 한다.

동성애자 커뮤니티의 경우는, 특히 동성애자 남성의 경우는 몸에 대한 재단의 정도는 이성애자 여성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듯하다. 여성들이 미적 기준에 부합하려 노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커뮤니티 안의 미적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다. 남성 패션계 혹은 남성 코스메틱 사업의 주 소비층이 남성 동성애자라는 것이 이러한 현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동성애자의 경우 이러한 몸에 대한 재단은 타자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다. 동성애자 커뮤니티 안에의 미적기준은 자신의 성적 욕망에서 출발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미적기준이 사회적인 흐름에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재단이 타자가 아닌 커뮤니티 내에서 우리가 우리를, 혹은 자신이 자신을 재단하는 것에서 이성애자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동성애자는 장동건이나 원빈, 이나영이나 김태희에 열광하며 성적욕망을 느낌과 동시에 자신의 몸을 그 기준에 맞추어서 재단한다.

게이 커뮤니티 안은 이성애자 사회만큼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하다. 혹은 이성애자 사회보다 더 외모가 중요시 된다고도 할 수 있겠다. 타자가 아닌 스스로의 재단인 동성애자 커뮤니티 안이라면 외모에 대한 가치부여, 그리고 외모에 대한 상품화, 주류 미적 기준에 맞지 않을 때의 소외 등의 현상은 어떤 식으로 변주될까?

우리는 이성애자와 같지만 또 다르다. 같은 대상을 보며 같은 생각을 하지만 또 다른 생각을 한다. 우리는 가끔 이성애자는 하지 못하는 생각을 하기도, 이성애자가 하는 생각을 하지 못하기도 한다.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중적이다. 우리에게 질투와 욕망은 같을 수도, 같지 않을 수도 있다. 성적 욕망이 미적기준의 원형이 될 수도 있다. 경계가 허물어지고, 사고의 틀이 모호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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