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5 - 트랜스젠더와 외현적 몸

꽃 든 자리
September 22, 2007

최근 개봉한 영화 ‘다세포 소녀’에서는 주인공 안소니(박진우 분)가 여성으로 ‘보이는’ 남성인 두눈박이(이은성 분)룰 보고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 나온다. 안소니는 두눈박이를 남성으로 생각하고 사랑했을까? 여성으로 ‘보이는’ 두눈박이는 여성인가? 아니면 남자의 성기를 달고 남자화장실에서 서서 소변을 보는 남성인가? 이 장면은 남성이라면 남성으로 보여야 하고, 여성으로 보인다면 여성이어야 한다는, 남성-남성적 외현 혹은 여성적 외현-여성의 알레고리를 뒤바꿔놓음으로써 외현적 몸과 개인의 성별 정체성 사이를 교란하고 있다.

외현적 몸은 단순히 성기의 형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외현적 몸은 사회적으로 여성/남성으로 보이는 몸이다. 뒤집어 말하면 그 몸을 구성하는 사회적 시선 자체가 외현적 몸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외현적 몸만큼 개인의 성별을 구획하는 가장 ‘확실한’ 기준은 없다. 하지만 트랜스젠더의 존재는 성별-외현적 몸이라는 알레고리의 ‘확실성’에 혼란을 준다. ‘보이는’-즉 시선에 의해 구획된- 성은 개인의 성별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시선과 성별 사이에 혼란 속에서 다시 시선을 통해 성별 정체성을 구획하려는 시도들이 계속 된다.

트랜스섹슈얼1 연예인 하리수씨는 ‘어떻게 보아도’ 여자이다. 아니, 오히려 그녀에게 있어 통속적인 여성성은 과장되어 있다. 교태로운 목소리, 아슬아슬한 S라인의 몸매, 마치 아름다운 여성의 공식 같은 긴 생머리. 그녀는 ‘너무’ 여성적이다. 문제는 그녀는 ‘어떻게 본다’는 시선이다. 그녀를 ‘어떻게’ 본다는 것인가. 그녀를 어떻게 양성 중 하나로 구획하는가. 그녀의 가슴과 엉덩이라인, 혹은 좁은 골반으로는 그녀를 온전히 여성으로 증명해낼 수 없다. 그녀의 질도 그녀를 온전히 여성으로 증명해내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과장된 웨이브댄스와 그녀의 교태로움이 그녀를 여성으로 구획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녀의 외현은 끊임없이 시선에 의해 구획되면서도 동시에 그것은 완전히 성공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유방과 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녀의 성은 무엇인가? 그녀가 수많은 수술로 남성적인 모든 것들을 제거한다면 그녀는 여성이 되는가? 성적 존재로서의 트랜스젠더의 섹스/젠더 정체성은 외현적 몸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 트랜스섹슈얼인 그녀를 여성으로 보는 시선,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생물학적인 성을 양성 중 하나로 구획해내려는 그 시선이 존재한다. 그냥 보아도 여성인 게 아니라, ‘어떻게 봐야’ 여성인 하리수씨는 ‘어떻게 보아도’ 여성이라 할지라도 그 시선이 존재하는 한 성의 경계 상에 서있는 성일 수밖에 없다.

트랜스젠더의 외현적 몸은 단일하지 않다. 자신이 트랜스젠더라고 생각할 뿐 전혀 치료를 받지 않은 몸도 있다. 호르몬 치료를 받아서 몸의 징후들을 변화시키고 있는 몸도 있고, 부분적으로만 수술을 받은 몸이 있고, ‘현대 의학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수술을 다 받은 ‘완성된(?)’ 트랜스젠더의 몸도 있다. 단지 치료의 여부와 단계뿐만 아니라 그/녀들의 외모, 태도, 옷차림 등에 의해서도 그/녀들은 다양한 차이로 구획된다.2 하지만 그/녀들의 몸은 양성으로 구분된 사회에 안착하지 못하고 정도의 차이를 갖고 경계선 상에 서 있다.

하지만 트랜스젠더들이 서 있는 경계는 남/녀의 경계가 아니라 양성/ 양성이 아닌 것이 경계이다. 그/녀들이 이루지 못하는 것은 그/녀들이 목적하는 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양성으로 분리된 사회에 안착하는 것이다. 특정한 조건을 가진 몸만이 성별을 정정할 수 있다는 대법원의 판결3에서 그 조건으로 규명해내는 것은 법원의 몫이긴 하지만 여전히 답이 없는 문제일 수밖에 없다. 트랜스젠더의 의미는 성이 남/녀의 육체와 정신이 잘못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몸과 다양한 성이 양성으로 구획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트랜스젠더의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트랜스젠더/ 非트랜스젠더가 명확하게 구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 또한 여/남의 경계처럼 허구적인 경계이다. 장애/ 비장애의 구도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모두 이상화된 육체라는 정상성의 기획 하에서 장애를 갖고 있으며 또한 그것에 대해 강박증을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또는 ‘100% 이성애자’라고 믿는 게 실은 이성애 중심사회에 대한 공포와 강박일 뿐 우리 모두들 동성애적 욕망을 가진 것처럼 말이다.4 우리는 모두 남성/여성이 아니라 양성을 구분 짓는 사회에서 남성되기/여성되기를 계속 노력하는 다양한 성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의 경계성이 현상적으로 더 잘 드러나는 것일 뿐 우리는 모두 양성에 안착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는 트랜스젠더들의 현실에 다다르면 논란이 된다. 사회에서 논의되는 트랜스젠더 담론은 어떻게 완벽한 다른 성이 되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성전환 수술’, ‘호적상 성별 정정’처럼 말이다. 또한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실제로 성전환수술을 원하고 다른 성이 되기를 원한다. 수술을 하지 않는 경우에도 그 이유는 자신의 몸에 만족하는 경우보다는 경제적, 의료적 이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트랜스젠더들이 양성적 구분을 교란하는 표상이라면, 동시에 왜 그/녀들은 양성의 구분에 안착하기 위해 노력하는가.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성장 과정에서 자신의 몸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한다. 자신이 가진 여/남으로서의 신체적 징후들에 대해 혐오하거나 부정하는 경험하는 동시에 자신이 갖지 못한 징후들에 대해서는 부재감과 상실감을 경험한다. 〈못생긴 트랜스젠더 김비이야기〉5의 저자 김비씨는 한 강연에서 ‘나의 남근을 혐오했고 쳐다보기도 싫었다. 이러한 혐오감은 내가 트랜스젠더임을 자각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어렸을 때부터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분명했다’고 이야기했다. 이런 식으로 한 개인의 정체성이 이미 확정되어 있고, 트랜스젠더의 문제는 단지 이러한 정체성으로서의 성과 육체로서의 성이 서로 잘못 연결된 ‘장애’라고 보는 담론이 우리 사회에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주된 담론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그저 수용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진다’는 보부아르의 ‘젠더구성론’을 기억해보자. 그렇다면 FTM 트랜스젠더은 왜 여성으로 길러지지 않고 남성으로 길러지는가? 여성의 몸에서는 여성 젠더가 구성되어야만 젠더 구성론이 성립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트랜스젠더 담론을 수용하려면 젠더가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보봐르 식의 젠더 구성론은 이미 섹스가 선천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가정을 가지고 있다. 현재의 페미니즘 이론/운동은 이러한 보부아르식의 젠더 구성론에 많은 부분 의존하고 있다. 젠더 구성론은 젠더 구성론 대로 양성구분적 이성애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이용하면서, 트랜스젠더는 인권과 치료의 문제로 손쉽게 결론내려는 이론/운동의 태도는 문제가 있다.

주디스 버틀러는 개인의 성별을 고정되어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애초에 고정된 성(sex)는 존재하지 않으며 개인의 성적 역할(gender)를 반복해서 수행함으로써 성(sex)가 구성된다는 것이다. ‘나는 남성/여성이다’라는 진술 자체는 이미 ‘나는 남성/여성이(될 것이)다’라는 수행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성은 애초에는 존재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완성되지도 않는 지속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성적 정체성(sexual identity)은 지속적인 젠더 수행의 결과인 것이다. 버틀러의 이러한 주장은 양성의 구획이 허구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끊임없이 ‘남성/여성’이 되기 위해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건 양성을 구획해 놓은 사회 속에 사는 개인이라면 트랜스젠더이건 그렇지 않건 마찬가지이다. 트랜스젠더 역시 우리 사회 속에서 자라나는 사람들이고 양성의 구분에서 자유롭지 않다. 오히려 그/녀들은 더 강하고 지속적인, 때로는 과장된 젠더 수행을 하게 된다. 트랜스젠더가 젠더를 과장하는 것은 그/녀들의 수행이 그만큼 고되다는 것일 뿐, 그것 자체가 양성 구획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바바라 크루거의 “Your body is a battleground"는 말은 다양한 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말인 즉슨, 몸은 언제나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억압들의 공세와 반격이 충돌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이데올로기와 그것에 의한 만들어지기도 하며 또한 저항하기도 하는 개인의 욕망을 이해하지 않고 개인의 몸을 이해할 수는 없다. 시선이라는 재료가 없이는 우리의 외현을 만들어낼 수 없다. 우리의 외현은 그것에 대한 작용이든 반작용이든 ‘시선들’-타자의 시선, 사회적 시선 그리고 스스로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진다. 트랜스젠더의 외현적 몸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녀들의 몸은 양성 분리해서 구획해려는 사회적 시선과 그 안으로 포섭되고 싶은 개인의 욕망, 그리고 경계선 상의 스스로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 충동하는 지점이다. 그/녀들의 외현은 충돌하는 그 전선 어딘가이다. 그렇기에 그/녀들의 몸을 단순히 장애라고, 호르몬과 매스로 치료할 수 있다고만 쉽게 판단내리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그/녀들에게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과 그것을 위해 그/녀들의 욕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트랜스젠더의 외현적 몸은 양성으로 성이 구획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의 불가능성을 입증한다. 그/녀들의 몸은 그런 의미로 양가적이다. 그/녀들이 더더욱 강하고 과장되게 남성/여성이 되고자 할수록, 그것이 불가능한 프로젝트임이 입증된다. 양성으로 개인을 구획하는 사회가 존재하는 한 그/녀들은 경계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의 양성구분 이데올로기가 트랜스젠더에게 남성/여성의 젠더 수행을 시키고, 동시에 그/녀들은 경계 상에 둠으로써 자기 스스로를 부정하는 변증법적인 관계가 성립된다.

그래서 트랜스젠더들이 치료받을 필요가 없느냐, 혹은 그/녀들의 젠더 수행이 이데올로기의 결과일 뿐이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트랜스젠더의 젠더 수행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그/녀들을 이데올로기부터 해방된 온전한 몸으로 볼 수도 없다는 것이다. 하리수 씨의 과장된 여성성을 보면서 저것이 원래의 ‘여성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의 몸은 없다. 오늘 내가 느끼는 행복은 사실 이데올로기와의 치열한 협상일 뿐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이데올로기 속에서 소심하게 그들의 뒷담을 까며 변주의 가능성을 찾고 있지 않는가?


  1. 트랜스젠더는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반대의 성을 욕구하며, 스스로를 반대의 성으로 인지하는 사람을 뜻한다. 사회적으로 하리수씨와 같이 성전환 수술을 받은 경우만 트랜스젠더라고 이해되는 경우가 많은데, 트랜스젠더는 수술의 여부가 아니라 스스로의 인지와 욕구에 의해 정체화된다. 트랜스젠더 중 성전환수술을 받은 사람이 ‘트랜스섹슈얼’이다. ↩︎

  2. 앉을 때의 자세, 콧수염의 흔적, 여성/남성스러운 옷차림, 걸음걸이, 어깨넓이, 골반넓이. 트랜스젠더를 구획해내려는 시도는 정말 몸의 모든 외현을 본다. 이처럼 트랜스젠더를 구획하려는 시선은 몸의 모든 부분을 관찰하고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트랜스젠더가 아닌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여성/남성으로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부분의 외현이 억압되어 재현되는가를 보여주는 바이기도 하다. ↩︎

  3. 이번 6월 대법원 판결에서는 성전환 수술 중 성기를 만드는 수술을 호적 상 성별정정을 허가해주는 중요한 기준으로 보고 있다. 이와 관련 성소수자 단체 등에서는 정소, 난소 등 여/남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것을 없애면 호적 정정을 허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도 할 말은 많지만 우선은 다음 기회에. ↩︎

  4. 모르는 줄 알앗나? 당신들이 동성애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직 자신의 성정체성을 ‘주체적으로’ 고민해보지 않은 당신들이다. ↩︎

  5. 김비, 2001, 오상. 영어강사이자 소설가인 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 김비씨는 이 책을 통해 트랜스젠더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과 트랜스젠더에 대한 실질적이고 실천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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