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4 - 보고 보이는 몸
치료를 받기 전과 받고 난 후의 내 얼굴은 다르다. 주사제에 스테로이드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근육비율이 높아지면서 얼굴 형태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변화가 워낙 느려서 나도 예전 사진을 보고서야 얼굴이 변했다는 걸 느낄 정도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반 년 쯤 전의 일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녀석과 함께 술 한 잔을 한 다음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속칭 “삐끼” 한 명이 다가오더니, 오빠들 오늘 물 좋다며 우리를 나이트클럽으로 끌고 가고자 했다. 돈도 없었거니와, 그런 곳에 가서 괜히 일반 여자와 얽히기도 싫었기에 그냥 뿌리치고 말았다. 내 친구 녀석은 좀 놀라는 눈치더니, “지금 너한테도 그런 거야?”라고 물었다. 녀석이 군대 ․ 인생 ․ 게임 ․ 여자 등등의 이야기를 나와 거리낌 없이 나누고, 나를 멀쩡한 사내자식으로 대하기는 했지만 그가 인정하는 내 남성성은 정신에 국한되는 것이고, 내 몸에서는 여전히 여성적인 무언가를 읽어내 왔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비슷한 일은 또 있다. 미성년자 관람 불가의 영화 - 음란물이 아니라, 공포물이다 - 를 보러 가거나 술집에 갈 때 신분증 검사를 당하는 경우가 있다. 처음에는 나도 ‘2’로 시작하는 주민등록증 내밀기가 껄끄러웠지만 이제는 무신경해졌는데, 치료 전부터 나를 알고 있던 친구들은 신분증 검사를 당할 때가 되면 자기들이 더 초조해한다.
하지만 사실은 의아해할 것도, 걱정할 것도 없다. 치료한 지 1년 쯤 지난 뒤에 나를 처음 만난 사람들은 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에 별 관심이 없다. 어쩌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해도 내 성별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군대를 가지 않기 위해” 정정을 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퉁명스러운 질문까지는 받아봤지만(가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군대 이상의 고통은 아무 것도 없고 군대를 가지 않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 널려 있다고 생각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일이 가장 중차대하다는 점은 알겠지만, 이렇게까지 확대해석하는 일부 사람들이 별로 유쾌하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나는 옷가게에 가면 “남자 분들은 이런 거 많이 찾으시던데…….”라는 말을 듣고, 좀 입이 거친 택시기사를 만나 장시간 차를 타야 할 경우에는 그의 성적 무용담을 들으면서 확실히 강남 서비스가 좋다는 둥, 하는 소리에 맞장구를 치고 아직 경험이 없다고 털어놓으면 숙맥이라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어머니의 마음이 상할 것을 생각하면 별로 꺼내놓고 싶지 않은 경험이지만, 레스토랑에 갔을 때에는 주인아주머니가 나와 내 동생을 보고 아들만 둘 있는 집은 든든해서 예전부터 너무 부러웠다는 말을 듣는다. 나의 정체를 굳이 까밝히지 않는다면 나는 평범한 일반 남자다. 그리고 내가 사지 멀쩡한 남자로 받아들여질 때, 누구도 내 얼굴에서 여성, 혹은 중성의 이미지를 읽지 않을 때에 나는 가장 행복하다.
하지만 가끔 나는, 본의 아니게 내가 그들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무섭다. 이마에 낙인이라도 찍혀 있어서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내 정체를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내 얼굴에서 묻어나는 중성적 이미지가 싫어 깨 버리고 싶었던 때에는, 나와 같이 다니는 친구들이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해도 나 때문에 부끄러우리라 생각하면서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고 싶은 적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의 고민은 다르다. 나는 누구도 속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다른 누구도 “내 성별은 무엇이다.”라고 말하지 않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갑자기 내 처지를 설명하기란 역시 불가능하다.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먹을 때에도 점원에게 나의 상태를 설명해야 하는지? 얼마나 가까워진 다음에야 나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가? 그러나 가까워진 다음에는 이미, 상대방은 내가 자기들을 속였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어느 소설 주인공이 말한 것처럼 “피부가 초록색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동아리 내에서도 나는 소수자이다. 여기에서는 내 피부가 초록색이다. 이곳에서만은 나의 정체를 사람들이 다 알고 있고, 나는 때때로 나를 관찰하는 시선을 느낀다. 몰랐는데 트랜스젠더라니 신기하군, 이라든지 저런 점을 보니 아직 여자 티가 남아 있는데, 하는 식의 시선이다. 내가 상상해낸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러한 시선은 나를 위축되게 만들고, 나는 어떻게 행동할 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전혀 모르는 일반들과 조별 학습을 하게 될 때보다도,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과 식사를 할 때보다도, 더 긴장하고 눈치를 보고 조용해지고 많이 웃는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나는 게이가 아니고 레즈비언일 수 없기 때문에, 때로 이질감을 느낀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 지 신경을 써야 하고, 나의 부적절한 행동이 학내에 유일한 이 아늑한 공동체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지 모르기 때문에 원래 하는 대로 행동하기 어렵다. 내 정체를 아는 사람들과 있는 것은 진정한 관계를 맺는 방법이기는 하겠지만, 이처럼 때로 힘들다. (내가 편하게 대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더 이상 그런 시선을 못 느끼거나, 처음부터 그들이 나를 그런 시선으로 대하지 않아서이다. 내게 남은 소원이 있다면, 보다 빨리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이런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동성애자들에게는 나름의 프라이드가 있고, 그 프라이드가 교육 ․ 장려된다. 그런 점에 있어서 나는 동성애자들이 부럽다. 내게 있어서 나의 신체는, 단지 남들과 다른 것이 아니라 장애 - 내가 느끼는 감정 그대로를 보다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병신성 - 이다. 때로 나의 몸을 보게 될 때마다 아직도 자괴감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비록 남녀에게 우리 사회에서 어떤 다른 시선을 던지는지 몸소 체험하고 - 정말 많이 다르다 - 그 경험을 통해 연애사업을 포함하는 여러 고민을 상담해주는 데에 적합한 입장에 섰다는 점은 이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이 내게 프라이드가 되기에는 아직 내 ‘내공’이 부족하다. 어느 트랜스젠더의 수기에서, 다른 트랜스젠더에게 다가가 “트랜스시죠?”라고 물었더니 피하더라는 말을 읽었는데 나는 피했던 사람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다른 장애처럼 내 장애도 다 드러나 보여서 사람들과 “까놓은” 관계를 맺었으면 좋겠다고 강하게 열망하는 한편으로, 절대 그 장애를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다고 역시 맹렬히 소원한다.
그래서 나의 신체와 나의 정신을 모두 낱낱이 알고 있는,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들이야말로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군대에 관한 고민은 요즘 내 친구들에게 가장 큰 문제이다. 그 이야기를 할 때조차 친구들은 “대한민국 남자들은 그래도 다 한 번씩 가야 하니까”라고 말하지 않고, “면제 못 받은 사람들은 다 가는 곳이니까”라고 말해준다. 여자인 다른 친구 하나는, 매우 오랫동안 입에 익어서 자꾸 튀어나오는 걸 삼키고, 장난삼아 나에 대해 자기를 일컬을 때, “이 언니가”라고 하는 대신 “이 누나가”라고 한다. 이 배려들을 내가 얼마나 감사히 생각하는지 모를 것이다. 그들은 나라는 존재를 굳이 판단하려 하지 않는다. 가끔 그들에게 폐를 끼치는 경우가 있고, 그들이 여전히 여성적 흔적을 읽어내는 내 얼굴에서 타인들은 전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데 따라 아차 하는 순간 어색한 순간이 있기도 하지만, 내게는 그들과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그들에게 나는, 이것저것을 떠나서 그냥 친구이자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깨달았다. 나를 남자로 보든, 트랜스젠더로 보든(그리고 지금에야 그런 경우가 없지만, 과거의 경우 여자로 보든), 누군가를 만나서 처음 바라볼 때마다 그 시선 안에 상대의 성별을 중대변수로 파악하려는 태도가 전제되어 있는 지금의 사회에서, 나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골치 아픈데 왜 굳이 그 따위로 살려하느냐는 질문은 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나도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잘 나가는 서울대생으로 쭉 살아나가면 되리라는 것을 나도 아는데, 왜 그 길을 벗어나야만 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이 모든 고민을 감수하면서도, 왜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어 억지로 사는 것보다는 덜 괴로운지, 아니, 행복한지 알 수 없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학창시절 내내 그랬던 것처럼 자살이나 요절을 갈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처지가 조금 나아졌다는 것이, 그에 따르는 불편함을 무조건 감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변해야 할 것은 오히려 사회가 아니던가? 나를, 내가 아닌 누군가를 볼 때라도, 그저 사람으로서 만날 수는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