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3 - 여자, 보기


September 22, 2007

홍대, 신촌, 이대. 역에 내려서면 여자들의 하이힐 소리가 지축을 울린다. 과감한 노출을 한 여성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내 눈 또한 그에 맞춰 빠르게 돌아간다. 짧은 치마, 좋다. 달라붙는 티셔츠, 바람직하다.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자가 지나갈 땐 마음속으로 “땡큐” 한 번 외쳐드리고, 티 안 나게 쳐다보는 스킬도 생겼다. 광고판 여기저기서는 눈부신 얼굴의 연예인들이 나를 향해 미소짓는다. 여자들은 꾸미고, 미소짓고, 어디에서나 드러내어지고, 나는 그 수혜자이다.

보고-보이는 관계에서 세상이 불공평하게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사실인 듯하다. 늘 보이는 것은 여자들이다. 물론 일차적인 문제는 항상 여자들만 보고 다니는 내 눈에 있겠지만 다른 문제들도 있다. TV쇼, 광고, 영화, 모든 종류의 영상물에서 카메라는 여성의 몸에 끈적끈적하게 밀착한다. 패션 잡지는 길거리를 다니는 여성들에게 좀 더 매끄러운 몸매와 좀 더 과감한 노출을 요구한다. 포르노의 세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관능적으로 움직이는 부드러운 육체들이 도처에서 우리의 눈을 채우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해 할 말이 없다. 별 것 없을 게 뻔한 모바일 화보를 받느라 핸드폰 요금을 날리고, 섹시한 차림으로 무대에 선 여가수들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운 나로서는 오히려 여성의 성 상품화에 은근히 기여하는 입장이 되기도 한다. 이성애자 남성들의 시선에 맞추어진 포르노에 대한 불평이라는 것도 결국 “왜 레즈비언들을 위한 레즈비언 포르노는 생산되지 않는가? (=왜 나 보라고 만들어진 재밌는 야동은 없는가?)” 정도의 불만일 뿐이다. 사실 나 자신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것에 대한 심리적 저항도 별로 가지고 있지 않다. 레즈비언 커뮤니티 안에서 여성은 자연스러운 “우리”이지만, 또 당연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심리적 저항이 생긴다면 명백하게 이성애자 남성의 시선으로 레즈비언을 성애화하는 상황을 맞닥뜨릴 때 정도이다.1

물론, 레즈비언들이 여성의 성을 성애화하여 향유하는 집단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시선이 한국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이성애자)남성적 시선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그것과 어긋나고, 훨씬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기도 한다. 획일적인 젊고 날씬하고 예쁜 여자의 기준에서 벗어나, 나이많은 여성이나 풍만한 몸, 중성적인 매력, 그런 것들도 인기를 누린다. (비록 젊고 날씬하고 예쁜 여자들은 늘 인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보통 사회가 여성에게 바라지 않는 덕목들이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는 존중되고, 하나의 성적 매력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레즈비언의 시선의 존재는 늘 은폐되기 마련이고, “여성을 성적으로 본다”는 것은 이성애주의적 사회의 빈약한 상상력 속에서 다시 하나의 구도로 수렴하기 마련이다. 젊고 예쁜 여자를 관음하는 마초의 시선으로.

사회에서는 보통 여자의 능동적인 성적 시선을 잘 상상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것이 같은 여자에게로 향해 있는 동성애적인 상황은 대부분의 경우에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인터넷을 하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게 된 것이 있는데, 인터넷에서 조금이라도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이야기를 하면 자연스럽게 그 아이디는 남성의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때 내가 여성임을 암시하는 이야기를 흘리게 되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내가 레즈비언일 가능성을 상상하기보다 애써 이성애적 사고의 틀에 맞추어 눈에 보이는 암시를 무시하려고 한다. 의식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단지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상상력의 빈곤은 비단 기존의 남성중심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일반 사회에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바깥세상보다는 한층 ‘진보’적인 가치관이 대세를 이루는 대학가에서도 이성애 중심적 사고방식은 여전하다. 다른 것은, 그렇게 ‘마초적’이라 재단되는 여성에 대한 성적 시선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느냐,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것이 과연 근본적으로 남성의/마초적인 시선이라고만 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야기되지 않는 것 같다.

개인적인 경험 속에서 내가 속한 대학 공동체는 늘 여학우에게 일정한 발화를 기대하곤 했다. 일반 사회에서 기대하는 “오빠!” 이상으로, 나는 그곳에서 여성으로서 -어디에서나 성적 대상이 되는 존재로써- 느끼는 상처와 경험들을 증언하기를 기대받는 느낌을 받았다. 신입생 환영회, 새터, 그 뒤로 이어진 각종 세미나들까지 쭉 그 느낌은 계속되었다. 거기 대한 솔직한 내 감정은 표리부동해지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반바에 들어서면 느껴지는 시선들, 서로를 평가하고 관음하는 교차되는 시선들에 익숙해져 있는 내가 과연 무슨 상처를 이야기하고 어떤 시선을 거부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고는 했다. 나는 기대받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들을 늘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렇게 가려져 있는 나의 시선을 드러내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면서, 나는 레즈비언의 시선이라는 설정 자체에 미묘한 모순들이 있지 않나 생각하기도 했다. 많은 레즈비언 권리 운동 속에서 레즈비언의 여성으로서 主體됨을 찬양하지만, 그것은 사실 또다르게 ‘여성을 대상화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 아닌가?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을 내면화한다는 것은 “여자의 눈으로 본다”는 것 이전에 “여자를 본다”는 사실이 강조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 전에, 현재 시점에서 독립적이고 단일한 레즈비언이라는 계층의 시선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있는가?

남성 동성애자의 시선을 들추는 것은 하나의 사회적인 폭로이며 뒤집기이다. ‘볼’ 자격만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되던 남성들이 어떤 시선에 의해 성적 대상화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은 세상에 대한 유쾌한 전복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에 반해 여성은 본래부터 볼 권리를 상실한 객체의 위치에 머무는 자들이었다. 그러한 여성을 보는 여성 동성애자의 시선을 드러내는 것이 남성 동성애자의 시선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의미의 전복을 끌어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전복의 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그 시선들은 결코 단일하다고 말할 수 없고 여성을 보는 기존의 남성적 시선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한편으로 그리 착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레즈비언들의 그 ‘착하지 않은’ 시선을 드러내는 데서 우리의 성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전혀 구체적이지 않은 공상 수준의 생각일 뿐이지만,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동성애에 관한 논의를 함에 있어 너무나도 이상화된 레즈비언들의 이야기만 접해오지 않았던가?


  1. 이것이 불쾌하게 여겨지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그 상황이 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위협이기 때문이지만, 그 상황이 위협이 되는 이유를 근본적으로 따지고 보면 결국 양성 간의 불평등한 관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애자 여성이 게이들에게 가지는 판타지가 그들에 대한 위협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실이 나로 하여금 여성에 대한 성적 시선 자체를 거부하게 하지는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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