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1 - 시선의 권력성과 폭력성

精春
September 22, 2007

1. 당신들의 눈에서 ‘보이는’ 눈빛.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면서 수백명의 사람들을 ‘본다’. 붐비는 셔틀버스 안, 대형강의실, 사람이 미어터질 듯한 번화가. 이런 모든 곳에서 우리는 타인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우리는 과반/동방에서 동기, 선후배를 ‘보고’ 친구들을 ‘보고’ 가족들을 ‘본다’. 이에 더해 우리는 거울 앞에서 스스로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본다’는 것이 언제나 어디서나 똑같지 않다는 것은 굳이 푸코 나부랭이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모두다 일상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無言의 눈빛으로. 왜 A를 바라보는 눈빛과 B를 바라보는 눈빛이 다른지. 왜 A를 바라볼 때는 일상적인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B를 바라볼 때는 눈쌀을 찌푸리거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가면서 바라보는지. 왜 A는 무의식적으로 지나가면서 B에 대해서는 한번씩 더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게 되는지.

그 눈빛은 당신들의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첫번째 반응이자 기준이다. 대놓고 비정상적이라고 말하기에는 당신들이 지나치게 위선적이거나 소심하기 때문에 당신들이 우리가 ‘알아차려주길 바라고’ 보내는 은근한 다그침이다. 당신들끼리의 조소적 눈빛의 은근한 교환. 그리고 그 희미한 미소. 분명히 드러나나 정의할 수 없는 ‘눈빛’으로 지적당하는 나의 비정상성. 이제부터 이 이야기는 그런 당신들의 눈빛에 대한 나의 恨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2. 첫번째 대면.

유치원 때였을 것이다. 나는 그때쯤 여자같다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선생님도 내가 아기자기한 소꿉놀이를 할 때면 기특하다고 하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여자애들에게 기특하다고 할 때랑 다른 눈빛을 보냈다. 끊임없이 나에게는 ‘여자같다’라는 비정상적인(그리고 남성중심적 사회에서는 비하적인) 표현이 따라다녔다.1 그리고 그런 말들은 내가 커가면서, 더이상 사람들이 그런 말을 입 밖으로 직설적으로 내뱉지 않을 만큼 위선적이 되었을 때는 그것은 묘한 시선으로 스스로 변화시켜 나에게 ‘너는 비정상이야’라고 끊임없이 환기시켜줬다.

시선, 그리고 그 속의 눈빛은 사람이 사람을 만날 때 가장 처음 보내는 ‘평가’이다. 마치 수영을 하기 전에 물이 얼마나 차가운지 시험해보는 어린 아이처럼, 난 어느 사회에 진입할 때마다 사람들의 눈빛 하나하나로 내가 그 사회에서 나의 방식대로 생존할 수 있는지를 나 스스로 체득해야했다. 당신들이 보내는 그 첫번째 경고. 그것을 무시하고 무작정 내 자존심을 내세우며 들어섰다가 상처를 입어야 했던 것은 한두번이 아니다. 눈치라는 것. 당신들의 눈빛으로 내가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 익히는 것. 그리고 그 눈빛이 작동하는 방식을 익히고 그에 맞추어 내가 아닌 가면을 쓰면서 다니는 것. 이것이 바로 이성애가 판치고 남성스러움이 찬양받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내가 당신들과 갖는 첫번째 대면에서 얻는 교훈이었다.

3. 시선의 물질성

당신들이 보내는 시선이 단순한 시선으로 남았으면 얼마나 살기가 편했으랴. 그러나 이런 모든 시선들은 내가 분명히 비정상적임을 느끼게 해줬다. 나는 생물학적으로는 분명히 남성이었지만 나의 취향, 손짓, 목소리, 걸음거리는 모두 사회적으로 여성이라고 하는 방향으로 본능적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런 나의 본성이 비정상임을 뼛속부터 깨닫고 살아왔어야 했다. 그런 시선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내 기억에 하나하나 박혀있었다. 그때는 어려서 그랬는지 몰라도 집에 돌아와서 그런 시선을 생각하는 것 자체로 몸서리가 쳐질 때도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유난히도 자존심이 셌던 시절. 비정상이라는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싫었다. 그런 시선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두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런 시선을 주는 사람들과 눈을 아예 마주치지 않거나 내 자신을 바꾸거나. 미안하지만 정말 모든 인간들이 그런 시선을 주는 상황에서 나의 선택은 내 자신을 바꿔야 한다는 선택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들의 그 ‘시선’은 단순한 시선이 아니었다. 그건 내 정신을 관통하면서 내 자신을 뼛속부터 바꾸라는 물질적인 폭력이었다.

사회적 기준에 맞게 내 자신을 변화시켜라.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문구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저 위에 누군가가 맞춰놓은 ‘스탠다드’에 맞게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서울대생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얻기 위해, 청년실업자라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 잘생겨지기 위해, 몸짱이라는 시선을 받기 위해. 뭐 물론 저런 기준에 어긋날 때에 가해지는 시선도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내가 받은 시선이 당신들이 받는 저런 시선과 동일/유사하다고 하기에는 난 너무 억울하다.

동성애는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남자는 언제나 남자다워야 하는 사회에서 여성스러운 남성 동성애자는 자신의 본질적인 정체성을 ‘여성스러운 남성 동성애자’로 위치지웠다. 난 몸짱도 아니고 잘생기지도 않았지만 내 정체성을 몸꽝 얼꽝으로 위치짓지 않는다. 그런 시선들은 최소한 당신들이 일정한 노력만 하면 변화할 가능성이라도 있다. 그리고 몸짱, 얼짱, 고졸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당신을 ‘변태’ 취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들이 나에게 보낸 시선은 변화할 가능성이 없는 나의 근본적인 정체성에 관한 시선이었다. 그리고 나의 근본적인 자아에 대해 당신들은 벌레보듯 바라보았다. 나는 성장하면서 그것이 변화할 수 없는 어떤 것이란 것을 깨달은 순간. 그렇기 때문에 그 시선은 언제나 나를 따라다닐 거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난 언제나 어디서나 그 폭력과 대면해야할 것이란 것을 깨달은 순간 머릿속이 백지창처럼 하얘지고 밤을 하얗게 지새며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4. 시선의 처절한 내재화

이제 나는 나의 정체성이 억지로 변화시킨다고 해서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임을 알고 이제는 굳이 내 자신을 억지로 변화시키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당신들의 시선을 받지 않기 위해,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 그 속에 ‘묻히고’ 싶다는 욕구. 어딜 가나 그런 시선을 받기 때문에 결국 그 타자의 시선으로 나를 보게 되는 비굴함. 이것 또한 푸코의 판옵티콘을 꺼내지 않더라도 유치원 시절 자기의 조그만 특이점 때문에 놀림을 받았던 사람들은 그 시선을 내가 나에게 똑같이 시선으로 보낸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사회에서 나의 시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선은 비대칭적인 일방적 규율이다. 그러나 권력을 갖는 시선, ‘정상성’의 시선은 절대 나에게 일방적으로 오는 것이 아닌 것이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유혹적이며 정상성은 끊임없이 ‘회복해야할’ 대상으로 ‘타자’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정상성-이 경우에서는 남성성-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을 때에만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방에 혼자 있을 때에도 끊임없이 내 머리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감시체계로 존재한다. 이를 위해 나도 한때 당신들이 시선을 보내는 곳이든 시선을 보내지 않는 곳이든 내 눈이 아닌 당신들의 눈으로 내 자신을 언제나 바라본 것이다.

한 사회의 타자가 그 사회의 동일자의 시선을 내재화하는 것은 스스로를 비정상이라고 규정짓는 작업이다. 그리고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의 시선을 내재화하는 것은 내가 내 자신을 ‘변태’라고 보는 것이다. 아침마다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를 변태라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이를 닦을 때 새끼 손가락이 자연스레 올라가며 흔히 ‘여성스럽다는’ 포즈로 이를 닦는 모습을 인식하며 나는 내 자신이 오늘도 변태스럽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잠이 깬다. 그렇게 당신들의 시선은 아주 고맙게도 어렸을 때부터 내가 내 자신을 타자화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나는 내 행동 하나하나를 뜯어봐야했다. 그리고 나의 눈이 아닌 ‘그들’의 눈으로 나의 행동을 여성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었다. 그리고는 여성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그걸 거세 해버리던지 아니면 그에 대응되는 남성적인 행동을 관찰하여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야 했다.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는 나는 의도적으로 내 목소리를 낮춰야했고 손짓에 곡선을 줄이고 걸음거리도 직선적으로, 콧소리는 나지 않게, 하나 하나씩 내 자신에 대해서 칼을 댔다.

그러나 당신들의 시선은 단순히 몸에 대한 칼부림이 아니다. 내 몸, 내 정신, 내 본능, 내 근본적 정체성에 대해 칼부림을 해댄다. 청소년기 당신들이 한창 性愛에 충만하여 이성에 대한 상상을 즐기며 이를 통해 스스로의 정상성을 확인하던 당시 나는 남자 생각을 하지 말게 해달라고 줄기차게 빌었다. 나의 정신은 근대적 정상성을 추구했지만 이는 닿을 수 없는 목표였다. 길거리에 활보하는 사람이 모두 정상이어야 하는 우리 사회에서 그럼 나는 길거리를 활보하면 안되는 정신병자인가. 20세기 초까지 동성애를 정신병으로 취급하며 격리수용을 하던 것은 푸코가 의학적 시선의 고고학을 논하면서 말하고자 했던 핵심. ‘시선’으로 처벌하고 ‘시선’으로 감시하는 이성애라는 근대권력은 사람의 본능마저 바꾸게 해달라고 빌게 만드는 기제인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적인 남성 이반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처절하도록 아픈 자기객관화와 자기부정에서 시작되어야만 했다.

5. 시선, 그 참을 수 없는 不在에 대한 두려움

푸코가 말했듯이 시선은 상호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히 비대칭적이다. 이 사회에 그물망처럼 얽매어진 이성애자들의 시선은 나를 분명히 옭아매었지만 나의 시선은 그들을 옭아매기는커녕 나는 그들의 정신세계에 있어서는 아직까지는 영원한 비존재자, 유령이다. 동성애는 상상조차 못하는 자네들의 빈곤한 상상력(상상력이 아니라 현실인지능력이겠다) 속에서 나는 나로써 호명되지 못한다. 그래, 설사 내가 이제 최소한 내 머릿속에서 내 자신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버렸다고 치고 많은 게이들을 만나면서 게이로써의 자존심과 pride를 어느정도 가졌다 하자. 나도 이제 조금은 강해져서 그런 시선을 보내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위선을 알게 되고 그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당당하게 나가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치자.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시선의 비대칭성에 의한 폭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알튀쎄가 말했듯이 개인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되며 이러한 호명작업에 따라 정체성을 형성해나간다. 그리고 이 호명은 이 사회가 그 정체성에 부여하는 여러가지 특징들을 스스로 수행해나가면서 완성된다. 이성애중심적 사회에서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남성’/‘여성’으로만 호명하고 사회는 그들을 남성/여성으로만 ‘본다’. 하지만 이데올로기가 호명하는 ‘나’와 내가 스스로 규정하는 ‘내’가 다르다면? 즉, 시선의 비대칭성에 따라 유령으로만 떠도는 동성애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호명되는가? 나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없는 사회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학교 수업시간이었다. 동성애 결혼에 대한 논의가 한참 진행 중이다. 교수님은 보수적이신지 동성애 혼인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도 조금 개념이 있어 보이는 학생이 동성애 결혼 찬성 입장을 줄기차게 편다. 그런데 난데없이 교수님이 던지는 한마디-“그래도 婚姻의 한자에 모두 계집 女가 들어가니 동성애자끼리의 결혼은 무리가 아닐까”. 나는 순간 피가 역류하는 듯했다. 그 말에 레즈비언은 전혀 상정되지 않았다는 몰이해는 차치하자. 교수님의 말은 논리가 아니라 농담이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농담’은 몇개가 오간다. 그리고 그 농담에 따라 그 수업시간에 있던 99% 이상의 학생은 (비)웃기 시작한다. 동성애 결혼 반대야 그렇다치자. 그러나 그 수업시간에 교수님이나 다른 학생들이 나를 동성애자로 ‘보기만’ 했어도 그런 농담은 쉽게 못했으리라. 그리고 그 수업시간에 철저히 일반 남성의 가면을 수행했어야 하는 나는 선뜻 불쾌한 표정조차 짓지 못한다.

이성애자 사회에서 커밍아웃을 널리 하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나를 외현적인 몸을 통해 이성애자 남성이라 파악한다. 내가 아무리 게이에 대한 편견에 걸맞는 행동을 하여도 당신들의 빈곤한 상상력/현실인지능력 속에서 나는 이성애자 남성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직도 동성애자를 온전히 인정할 능력조차 갖추지 못한 이 되먹지 못한 사회에서도 나는 이성애자 남성의 가면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동성애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무의식적으로 가정되는 시선들만큼 이성애중심적인 시선은 없다. 물론 이런 철저한 시선의 부재가 변태라고 보는 시선의 과잉보다는 낫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저런 수업시간 속에서 나의 목은 갑자기 막히고 혀는 바늘에 찔린 채 나는 전체 그림 속에서 하얗게 지워지는 느낌. 이것은 차라리 나를 무엇으로든지 바라보기나 해달라고 절규하고 싶은 마음.

시선의 비대칭성. 그건 타자의 시선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그 타자를 극단적으로 혐오하면서도 타자 자체가 사회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중적인 시선.(그러면 도대체 왜 그 타자에 대해 그리도 혐오하는가.) 그 속에서 타자가 아닌 양 살아가는 나. 나는 언제까지 허우적대야 하는지.

6. 나가며…

눈빛. 당신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눈빛을 보내거나 또한 보내지 않는다. 그 속에서 당신들의 눈빛을 익히고 그거에 따라 인형처럼 행동해온지가 어언 스물 다섯해를 향해 달려간다. 써보니깐 글이 너무 암울하다. 다시 보니깐 마치 당신들을 단죄하고야 말겠다는 한으로 사무친 것 같다. 그런 것 같다면 반성하고 또 반성해라. 하지만 이 글을 읽었다고 또 너무 조심스러운 시선을 보내며 나를 불편하게 만들 생각일랑 말아라. 그런 알량한 시선을 또 받고 싶지 않으니. 어쩌면 지금 살고 있는 우리는 이미 그 시선에 익숙해지다 못해 이제는 그 시선을 비틀며 당신들의 권력에 한번 못된 불장난을 해보고 싶은 욕구마저 들기 시작할 수도 있으니.


  1. 당연하게도, 남성동성애자들이 모두 여성스럽다는 것도 편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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