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기획의도

#기획의도
hiro
September 22, 2007

흔히 인간의 감각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나오는 것에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도가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 저 모든 감각들의 범위가 동등하고 균일하게 다가오고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 인간 스스로가 느낄 수 없을 때도 있고,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것들 사이에서의 비교우위에 있어서 큰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버려지는 부분도 있다. 사람에 따라서 특정 감각이 뛰어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감각의 인지에 있어서 근대 이후 가장 강조되어 왔던 부분은 ‘시각의 영역’이다. 다른 감각들보다 더 빠르고 확실하게 나타나는 부분이 시각이다. ‘Seeing is believing’과 같은 표현이라든가, 데카르트 식의 진리에 대한 믿음에서처럼, 근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분명한 주체인 ‘나’가 보는 행위를 하고, 그렇게 보여지는 세계가 진실이라고 믿는 기본적인 틀은 많은 비판들을 받아왔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잠에서 깨어나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보게 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 누가 정상적인 인간인지, 외계인인지, 남성인지, 여성인지, 학생인지, 옷차림에서 그들이 어디를 가는지, 어떤 직업을 가졌을지, 때로는 심지어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일지까지 그리 힘들게 노력하지 않고서도 원하는 정보들을 ‘눈’이라는 기관을 통해서 끌어낼 수 있다.

여기서 왜 시각이 강조되었다든지, 근대적인 인식의 출발점이 어떻다든지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오늘날 사회에서 보는 행위는 여전히도 중요한 것이지만 이것이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진 않아 왔다는 것이다. 볼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특권이었다. 신분이 낮았던 존재는 상류층을 같은 눈높이에서 쳐다볼 수 없었고 왕은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태양에 비교되었다. 여성은 집안에 속박된 존재로 남겨지고, 다른 세계를 구경할 수 있던 것은 백인 부르주아 남성들이었다. 〈모던 타임스〉 식의 공장에선 노동자들은 감시카메라로 고용주에게 일방적으로 감시당한다. 무수히 많은 권력 요소들을 경계로 시선의 주도권은 어디에서든지 존재한다. 누군가들은 적극적으로 보는 행위의 주체로 활동할 수 있고, 누군가들은 줄곧 보여지는 대상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시선은 그것의 정치적인 올바름에 대해 사회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든지 간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최소한 무엇이 문제인지 정도는 가시화된다는 것이다. 한편, 이런 시선들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있다. 누군가들은 보는 존재도, 보여지는 존재도 되지 못했다. 그들은 ‘보다’라는 시선의 맥락 자체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이들에게 인간들이 이름을 붙이기 전에도 그들은 계속해서 존재했지만, 이름이 붙여진다 한들 그 이름은 썩 좋은 의미는 되지 못했다. 그들의 시선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왔지만, 여전히도 인식되지는 못한다.

이번에 Queer Fly에서 첫 기획으로 잡은 주제는 ‘시선’이다. 성적소수자들은 사회로부터 비가시화되어 그들의 소수성을 더욱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들 중에 하나이다. 여/남/소/노와 같이 신체적, 생물학적으로 사람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증명하는 분명한 요소가 퀴어들에겐 없다. 그렇기에 주변에서 누가 레즈비언인지, 누가 게이인지 분명히 보여지는 것이 아니다. 덕분에(?) 오랜 시간동안 퀴어들에 대한 가시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요즘에 들어서야 퀴어에 관한 이야기는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왕의 남자〉, 〈브로크백마운틴〉과 같은 영화가 뜨고 나면서부터 점차 퀴어 코드는 하나의 유행으로 자리 잡았다. 게이의 이미지는 코스모폴리탄 잡지에나 나올 법한 메트로 섹슈얼로, 하리수 씨의 등장 이후 트랜스젠더의 이미지도 그대로 굳어졌다. 반면에, 레즈비언의 이미지는 여전히도 가시화되지 못하고 있는 측면이 많다. 최근의 이런 가시화된 퀴어의 모습은 실질적인 성적소수자들의 삶을 반영하였다기보다는, 일반들의 판타지와 포비아를 적절히 섞어 놓은 시선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말하는게 맞을 것이다.1 퀴어들의 욕망이 담긴 시선과 실질적인 모습들은 하나도 제대로 녹아나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시선’이라는 기획을 내걸고서, 무수히 많은 저널들에서 다루어지듯이 일반들의 시선은 어떤 것이 잘못되었고, 보여지는 퀴어의 모습은 이렇다고 길게 늘어놓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또한 넓은 범위로의 관점의 이야기까지도 많이 하지는 않을 것이다. 논의를 하는 과정에서 Queer Fly는 되도록 초점을 시각성의 지점, ‘일상적으로 퀴어의 눈을 통해 보다’에 맞추려고 노력하였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보여지는 퀴어의 이미지가 아닌, 퀴어가 보는 다른 세계의 모습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글들의 모음이 되기도 하지만, 평소에 늘상 ‘내’가 하는 일들에 지나지 않기도 하다. 이번 기획을 독자들이 읽어나가는데 있어서 조심해주었으면 하는 측면은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담보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퀴어의 시선’이라는 말을 거창하게 내걸었지만, 실상 이에 대한 객관적이고 확실한 대답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 성적소수자들은 개개인이 L/G/B/T2라는 정체성말고도 다양한 계급과 정체성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제각기 성적 취향도 다르고 소수자 감수성도 천차만별이다. 그렇기에 이것을 일반의 기준에서 보기에 퀴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뭉뚱그려 ‘퀴어들은 거의 비슷한 시선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라고 추측하는 것은 위험한 일반화이다. Queer Fly의 시선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평가되는, 혹은 순수하고 착한 시선들일 것을 기대한다면 그렇지 못하다. 시선에 관한 정결하고 분석적인 글일 것을 기대한다면 역시 그렇지도 않다. 그저 당신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짓을 평상시에 하고 있고 그저 그런 경험들에 관해서 조금 상세히 늘어놓았을 뿐이다. 혼란도 있고 음흉함도 있고 괴로움도 있고 즐거움도 담겨 있다. 무엇보다도 주의할 사실은 여기 이야기들이 지극히도 평범한 당신 옆의 사람이 이야기라는 것이다. 당신의 이야기라면 더 좋겠고.

精春’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 구성되고 재단되어야 했던 나에 대한 기억들에 대해 약간은 자욱한, 지독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시렌’은 약간은 일반들에게 무섭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하지만 너무도 일상적인 게이의 시선에 대해 이야기하고 ‘’은 게이의 전복적 시선과는 다르게 잘 부각되지 않는 레즈비언의 시선의 문제에 대해 고민 지점들을 말한다. ‘준영’은 트랜스젠더로 늘상 있어왔던 시선에 대한 기억과 스치는 느낌들을, ‘꽃 든 자리’는 여/남의 경계로 이분법의 틀에 갇혀 있는 현재의 젠더 담론에 관한 주디스 버틀러의 논의를 언급하며 트랜스젠더의 외현적인 몸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령’은 보는 행위의 간단한 뒤바꿈의 차이를 그림으로 표현한다. ‘파랑’은 이반들에게 있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이상형과 그것을 닮아 가고자 하는 욕망을 몇 가지 상황 제시를 통해 풀어낸다. ‘’과 ‘세요’는 일반들의 레즈비언과 게이에 대한 몇 가지 편견적 시선에 대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마지막으로 이반들 사이에서 서로가 서로를 보는 오해와 차이에 관한 잡담들을 모아보았다.

이제 Queer Fly의 첫 이야기이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서로의 글에 대해 최소한의 편집만이 이루어졌으면 싶었지만, 그 과정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들 최대한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끌어내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단 한 명의 독자에게 읽힌다 하여도 충분히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전달되었다면 여기서의 노력은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다. 자, 이렇게 재미없는 기획 소개 글은 가볍게 넘기기로 하고 이제부터 조금 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살펴보는 것이 어떨까?


  1. 이성애주의가 굳어져 있는 사회는 차별성을 위해서라도 동성애를 하는 인간들에게 이성애자들과 무언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그것이 이성애자 자신들에게는 해가 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

  2. 레즈비언/게이/바이/트랜스젠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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